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지워져 가는 발걸음 그는 기억하지 않는다/ 고경자

지워져 가는 발걸음 그는 기억하지 않는다 고경자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 밀고 당기며 어둠이 만지고 간 계단 위로 머리만 둥둥 떠다닌다. 독존의식이 강한 머리와 가벼운 머리 정서가 비통한 머리들 암호처럼 일렁이며 수많은 머리들이 숲을 이루어 계단을 오른다. 통제 잃은 자아 상실한 발 하나 꿈틀거리는 계단을 구른다. 하얗게 질린 어둠의 눈썹에 내려앉아 우주의 숨결을 불어 넣고 해마는 의식의 끈을 붙잡아 심폐소생술을 하네. 흐려지는 의식이 구름계단을 밟고 어둠의 중간쯤을 걸어간다. 스쳐가는 교차로도 없는데 어디로 가는 것일까. 세상에서 하나씩 지워져 가는 발걸음 그는 기억하지 않는다. -전문(p. 69-70) ---------------------------- * 『월간문학』 2023-11월(657)호 에서 *..

먼지화엄경/ 강영은

먼지화엄경 강영은 섣달 그믐날, 총체를 들고 먼지를 턴다. 하나로 묶인 말꼬리 속, 유리창의 투명 얼굴이 털려나가고 책갈피의 자음과 모음이 털려 나가고 피아노의 흑백 계단이 털려 나가고 커튼 자락 주름 잡힌 고뇌가 털려 나가고 냉장고 위 두껍게 쌓인 침묵이 털려 나간다. 햇빛 속, 보이지 않던 세상이 화엄을 이룬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먼지화엄경을 다시 읽는다. 나를 이루고 있는 접속사와 감탄 부호, 수납장 속의 바퀴벌레처럼 먼지로 남아 있는 모든 것, 내가 이름 지은 거머리별과 이름을 갖고 싶어 하는 뭇별들, 진화 중인 먼지까지 모조리 품고 있는 비로나자불의 구름바다 속, 나는 총체적인 먼지다 -전문(p. 107)// 『다층』 2009-봄(24)호 수록作 --------------------- * 『다층..

뿌리/ 민병도

뿌리 민병도 그 길의 끝이 어딘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걸으면 걷는 대로 매 순간이 끝이었지만 아무도 가로막아선 벽을 탓하지 않았다 갈 수 없는 곳에서도 그들은 길을 보았다 수건을 두르거나 촛불이 고작이지만 뼈보다 더욱 단단한 바위마저 뚫었다 캄캄한 어둠에서도 그들은 해를 만났다 희망 하나 절망이 아홉, 작지만 뜻은 붉어 언제나 그 때 그 자리 맨손으로 이겼다 노숙의 시린 어깨를 다독이는 달빛처럼 돌아선 잎새에도 봄이 오면 비로소 떨어진 꽃잎 하나로 제 울음을 달랬다 -전문(p. 94)// 『다층』 2008-가을(39)호 수록作 --------------------- * 『다층』 2023-겨울(100)호 에서 * 민병도/ 197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슬픔의 상류』『장국밥』『원효』『고요의 ..

막장의 카나리아/ 정한용

막장의 카나리아 정한용 1 옛날, 석탄을 캐는 갱도 막장에서는 언제 가스가 새어 나와 폭발할지 몰라, 공기 변화에 민감한 카나리아를 함께 데리고 갔다고 한다. 예민한 카나리아가 숨 막혀 죽으면, 그제야 광부들은 눈치를 채고 재빨리 막장을 빠져나오곤 했다. 새는 죽으면서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일러주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슬퍼했을까. 2 카나리아 제도는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에 흩어져 있는 7개의 섬. 가장 가까운 섬이 모로코 해안에서 100㎞나 떨어져 있고, 가장 큰 섬인 테네리페에는 만년설을 뒤집어 쓴 거대한 활화산이 있다. 스페인 속령으로, 현재 170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지금은 일 년에 천만 명이나 찾아가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휴양지가 되..

하!(Ha!) 요나/ 박완호

Ha! 요나 박완호 그때 요나는, 말랑말랑한 스물이었다. 수업시간이면 맨 앞에 앉아 한밤의 치꽃처럼 흰 이를 드러내고 웃던, 운동장의 축구공처럼 어디서나 통통 튀던 요나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별이라도 헤아릴 요량이었을까 이층 난간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보다가 어린 별 하나가 지상으로 굴러떨어지는 걸 본 걸까 떨어진 별은 다시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대신 아름다운 넋이 별이 되어 반짝인다는 걸 알았을까 하늘에서 땅바닥까지의 거리만큼이나 먼 이층에서의 낙하는 얼마나 아득했을까 언제까지라도 갓 스물로 말랑말랑하게 남을 네가 세상에 잠시 다녀갔었음을 이렇게라고 새겨주고자 하는, 날 -전문(p. 31)// 『다층』 2008-여름(38)호 수록作 --------------------- * 『다층』 2023-겨울(10..

날아오르나, 새/ 신용목

날아오르나, 새 신용목 끙, 고요가 무릎을 편다, 빈 논바닥 펄럭여 날지 못하고 가슴에 흙을 묻힌 짚불들에, 연기의 몸을 주는 저 노인 속탈의 불꽃을 선물하는 아버지 한 필, 광목 같은 연기에 슬쩍 목숨을 묶어놓았나 몸 속의 불꽃을 들여다보는 저녁이, 뒷모습을 토해놓는다 일몰이 마지막 손을 뻗어 건너편 산의 이마를 짚을 때 그 손바닥, 붉게 달군 손금들이 능선으로 누워 마을을 건너가고, 안녕하신가 산턱마다 무덤 무덤 무덤들, 시간이 디디고 간 발자국들 무거운 등을 뒤척여 연기의 이불을 덮는다 한때 어린 모였고 숙인 벼였고 날리는 짚불이었을 끄덕끄덕 연기에 몸을 주는, 아버지 -전문(p. 62-63)// 『다층』 2004-겨울(24)호 수록作 --------------------- * 『다층』 2023-겨..

사람 없는 집/ 길상호

사람 없는 집 길상호 문패만 걸려 있는 집이 있다 바람 찾아오면 삐이걱 아픈 몸 열어주는, 사람 없는 그 집에서 풀들만 어지럽다 흙벽 틈새까지 뿌리 박은 풀잎은 싱싱하다 지게는 짐 없이도 버려진 삶 더 무거운지 벽에 기대 온종일 얼굴 돌리지 않고 나무 가득 쌓여 있던 헛간을 텅 비어 이 집 먼지만으로 허기 채우고 있다 거미줄도 세월과 함께 축 늘어져 아무런 기억 걸려들지 않을 듯한 집 대문에 꽂혀 있는 오래된 편지 한 장 언제부터 거기서 주인 기다린 것일까 여기가 맞는데, 문패 다시 확인해 보고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갈 수 없었을 사연 저녁 되어도 돌아오는 발자국 없이 나의 상념도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사람 없는 집에서 문패를 보며 떠나간 이름의 주인들 몹시 그립다 -전문(p. 31)// 『다층』 200..

밤의 소리들/ 심재휘

밤의 소리들 심재휘 밤은 깊고 사랑은 차다 앞길 포장마차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두런거림 토막난 낙지처럼 나는 서울에 살면서 잠결에 들은 고향집에서의 소리들을 이야기하련다 사랑은 깊고 밤이 차다 집이 허공으로 높이 오를수록 가족들의 잠 아래로 바람소리 거칠어지고 무호흡증 노부老父의 간헐적인 날숨 사이를 그 어둡고도 싸늘한 침묵 속을 유영하듯 밤새 뒤척이는 어린 딸의 꿈 소리 웃기는군 화물차 소리, 한밤의 택시 소리, 희부윰한 오토바이 소리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저 소리 달리는 소리들은 언제나 웃기는군 그렇지 새벽인 것이다 개 짖는 소리는 또 아버지를 깨우고 저쪽 끝 외곽에서 출발하여 시내를 지나 이곳 종점에 벌써 다다른 새벽 버스의 낡은 엔진 소리 눈물나는군 밤도 지나가고 사랑도 간다 허공의 집이여..

이형우_사막의 현상학(발췌)/ 들풀 춤사위 : 김금용

中 들풀 춤사위 김금용 등 뒤에서 노을이 안아줄 때 좋아라 하나하나 살아나서 온몸이 간지러워라 오색 둥근 바람을 따라 두 팔을 벌리며 달려가면 두 팔 두 다리도 가볍게 떠오르고 팔을 벌려 무술 팔괘 모습을 흉내 내다 보면 독수리도 되고 다리 하나 올려 곧추서면 우아한 학이 되고 장난스레 몸을 웅크리면 원숭이도 되고 자유로워라 춤사위엔 가드레일이 없어라 아무 구분도 필요 없어라 시선을 마주하면 민들레도 엉겅퀴도 온몸을 흔들어라 고양이도 강아지도 날아가던 참새도 어깨춤 추며 달려라 서로 밟고 뜯어 먹혀도 들꽃이 들풀이 함께 춤추는 너른 초원 껴입었던 옷 벗어던지고 나를 허무니 좋아라 붉은 춤사위에 실리니 좋아라 -전문- 22 * 심사위원: 문효치, 황정산, 유성호(글, p.19) ▶ 사막의 현상학/ 1-4...

실거리나무꽃이 피고 있다/ 변종태

실거리나무꽃이 피고 있다 변종태 1 오월에는 벽이 자란다. 벽이 벽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고, 벽이 벽과 함께 흐르는 오월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 벽이 벽에 기대서서 저들끼리 사유의 도랑을 낸다. 2 세월의 흐름은 제자리를 맴도는데, 안개가 낮게 깔린 뒷골목에서 실거리나무가 노오란 웃음을 흘리며 지퍼를 내리고 있다. 3 바람이 불고 있다. 노오란 바람이 실거리나무를 스쳐와 안개꽃을 흔들고 있다. 시간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다. 그리움은 절대로 한 쌍의 무리를 짓는 일이 없다. 보도 블록 사이에서 잡초가 자라고, 서러움이 자라고, 아픔이 자란다. 4 이대로 머물 수는 없다. 이대로 떠날 수도 없다. 오월에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죄가 되는데 모두가 떠나버린 빈 들판 노오란 실거리꽃이 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