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나금숙 연애 나금숙 비 온 다음날 흙이 무른 그 숲에서 당신은 발자국이 패이도록 나를 들어 올려 안았습니다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니 움푹 패인 자리에 흰 달빛이 순식간에 와 고였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혹은 다시 안고 반투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큰 키, 그 푸른 안개기둥 을 감고 칡넝쿨이 끝없이 올라갑..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20
귀뚜라미/ 서하 귀뚜라미 서하 옷 수선하는 아랫마을 봉자 이모, 딸을 내리 여덟 낳고는 귀 틀어막고 살았어 틀어막아도 틀어막아도 -그 배는 무신 배길래 기집이 글키나 마이 들어 안자쓰꼬 귀뚤귀뚤 어른들의 잔소리 그칠 줄 몰랐고 그 소리 바늘구멍으로 들어오는 황소바람 같았어 잔뜩 엎드려 지내던 어느 날 바..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9
끗발/ 서하 끗발 -9 시골마을까지 적셔버린 바다 이야기, 그 원조는 아버지가 아닐까 신혼 때 아버지는 9 때문에 신이 났고 어머니는 9 때문에 혼이 났다 신접살림 나면서 받은 전답 바다에 빠뜨리고도 모자라 딸자식 불국사 수학여행 보내려고 숨겨둔 깨 한 말까지 바다에 바쳤다 미쳤다며 어머니 길길이 날뛰었..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9
숲, 바람의 무도/ 고석종 숲, 바람의 무도 고석종 누구든 어둠을 건너려면 눈을 감아야 한다 저 숲속, 웅크린 적멸도 그렇게 유희의 징검다리를 건너갔을 게다 면식범일까 덫에 걸린 털목도리를 걷어내자 어금니를 앙다문 적멸의 유희가 벌긋거렸다 떴다방인가 저주파가 환시처럼 떠다니던 날, 누군가 할켜대던 허공 벽 패인 ..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8
냄비 속의 달/ 고석종 냄비 속의 달 고석종 세상은, 찌그러진, 냄비라네 잃어버린 고대도시 이끼 낀 벽을 뚫고 나온 미끈한 여자가 지중해의 물침대에 누워 있네 하늘엔 끓는 물 달그림자 속에서 숨 막아 오는 열기를 차단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흠뻑 젖었네 물속의 불기둥이 출렁거릴 때마다 그녀가 연기처럼 타오르며 노래..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8
참깨밭을 지나며/ 배교윤 참깨밭을 지나며 배교윤 애물스런 자식의 영혼 한 자락씩을 염주에 꿰고 산이 산을 잡고 선 장산(長山) 보리암으로 한산모시 치마 저고리 은비녀로 쪽진 머리 하얀 버선, 옥빛 고무신 신고 구슬가방에는 손수건 한 장 칠월 백중날이면 하얀 참깨꽃을 보며 긴 신작로를 따라 절에 가시던 어머니 곱던 시..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7
앉은뱅이의 춤/ 배교윤 앉은뱅이의 춤 배교윤 얼음 풀린 봄 땅 길섶마다 앉은뱅이로 앉았다가 봄이 떠나가는 날 노란 꽃잎 떨구고 미루나무 숲을 지나 천년에 닿기 위해 하늘로 오르는 군무(群舞) 언젠가 지하도에서 본 앉은뱅이 꼽추의 등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온 저 민들레 꽃씨들의 춤 * 시집 『내 마음의 풍광』에서/ 2003...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7
해피 버스데이/ 오탁번 해피 버스데이 오탁번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6
어금니/ 오탁번 어금니 오탁번 문갑 서랍을 정리하다가 내 어금니를 만났다 10년 전 충치로 뽑혀 조그만 곽 속에서 얌전히 잠자던 어금니를 충치균이 죽지 않고 살아서 하얗게 갉아먹었다 칫솔로 잘 닦아서 다시 잘 모셔두기로 한다 내가 만난 나의 유골! 10년 동안 캄캄한 어둠 속에서 충치균에게 살신공양하고 있는 ..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6
칼/ 이영광 칼 이영광 시를 쓰면서 사나워졌습니다 타협을 몰라 그렇습니다 아니, 타협으로 숱한 밤을 새워서 그렇습니다 약한 자는 나날이 악해져 핏발 선 눈을 하고 더 약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세월이라지요 날마다 지기 때문에 심장에서 무럭무럭 자라온 한 뼘, 칼이 무섭습니다 * 시집『아픈 천국』에서/ 2010...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