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나무
손한옥
오빠의 젊음을 삶의 한 막 속으로 접은 뒷장에
나의 시 한 편 오빠의 등 뒤에 꽃등불로 밝힌다
늘 푸른 나무로 서 있는 큰오빠는 내 고향의 당산나무
세 아름 되는 당산나무가 있다 그 아래를 지나갈 때는 면장님도 온몸을 오므리고 발자국 소리를 죽였지만 서울 사는 큰오빠가 바퀴 달린 커다란 가방을 들고 지날 때면 당산나무보다 더 크고 당당했다 주근깨가 핀 볼록한 내 뺨에 오빠의 뽀뽀는 그림에서 본 서양 영화배우 같다고 느끼면서 눈은 바퀴 달린 가방을 연다
양잿물과 보리등겨를 뭉쳐 만든 비누만 쓰던 언니의 선물로 분 냄새 폴폴나는 미국 비누 다이알, 누런 갱지만 쓰던 필이와 숙이에게 자랑한 색색으로 만든 매끈한 종이들, 깎으면 지우개가 나오는 지우개연필, 바늘만큼만 찔려도 내 손가락에 감겨있는 U. S. A. 밴드, 큰오빠의 바퀴 달린 그 가방에서 풍요와 꿈이 별처럼 쏟아졌다
추석을 겨우 넘긴 어느 날 당산나무보다 더 크고 당당한 큰오빠가 처음으로 우리들같이 우는 걸 보았다 아버지의 부음으로 당산나무 밑을 지나오며 “아버지!” 하던 그 통곡소리에 뒷산에선 회오리바람이 일고 당산나무 잎은 술렁거렸다
감을 파먹던 까마귀 까악깍 울며 날아가고 소를 매어둔 밤나무의 올밤송이가 투두둑 떨어졌다
* 시집『직설적인, 아주 직설적인』에서/ 2010.9.20 (주)천년의시작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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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한옥/ 경남 밀양 출생, 2002 『미네르바』로 작품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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