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이현승_『얼굴의 탄생』(발췌)/ 황혼 : 오장환

검지 정숙자 2021. 5. 27. 18:01

 

    황혼

 

    오장환(1918-1951, 33세)

 

 

  직업 소개에는 실업자들이 일터와 같이 출근하였다. 아무 일도 안하면 일할 때보다는 야위어진다. 검푸른 황혼은 언덕 알로 깔리어오고 가로수와 절망과 같은 나의 긴 그림자는 군중의 대하에 짓밟히었다.

 

  바보와 같이 거물어지는 하늘을 보며 나는 나의 키보다 얕은 가로수에 기대어 섰다. 병든 나에게도 고향은 있다. 근육dl 풀릴 때 향수는 실마리처럼 풀려나온다. 나는 젊음의 자랑과 희망을, 나의 무거운 절망의 그림자와 함께, 뭇사람의 웃음과 발길에 채우고 밟히며 스미어오는 황혼에 맡겨버린다.

 

  제집을 향하는 많은 군중들은 시끄러이 떠들며, 부산히 어둠 속으로 흩어져 버리고, 나는 공복의 눈을 떠, 희미한 路燈을 본다. 띠어띠엄 서 있는 포도 우에 잎새 없는 가로수도 나와 같이 공허하고나.

 

  고향이여! 황혼의 저자에서 나는 아리따운 너의 기억을 찾어 나의 전서구와 같이 날려보낸다. 정든 고샅, 썩은 울타리, 늙은 아베의 하얀 상투에는 몇 나절의 때묻은 회상이 맺혀 있는가. 우거진 송림 속으로 곱게 보이는 고향이여! 병든 학이었다. 너는 날마다 여위어가는······

 

  어디를 가도 사람보다 일 잘하는 기계는 나날이 늘어나가고, 나는 병든 사나이. 야윈 손을 들어 오랫동안 타 隋怠와, 무기력을 극진히 어루만졌다. 어두워지는 황혼 속에서,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보이지 않는 황혼 속에서, 나는 힘없는 분노와 절망을 묻어버린다.

    -전문-

 

 

  오장환 시의 부정의식-초기시를 중심으로(발췌)_이현승/ 시인

  「황혼」에는 실직한 노동자를 화자로 내세워 실직이 주는 무력감과 절망감 그리고 고향에 대한 향수를 보여 준다. 1연의 "아무 일도 안하면 일할 때보다 야위어진다"는 진술에서 엿보이는 절망감은 "나의 긴 그림자를 군중의 대하에 짓밟히었다"라는 감각적 문장으로 이어진다. 근대적인 도시 공간이 지닌 위력은 어떤 사람이든 소외된 객체로 만들어 버린다는 데 있다. 개인들이 군중 속에서 익명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도시 공간의 거대함과 교환관계는 필연적으로 개인적 소외를 심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시의 화자는 익명성 속에서 결국 향수에 시달리며 자신의 고향을 불러본다. "병든 나에게도 고향은 있다"는 진술은 역설적으로 도시 공간에서 사물화된 개인성에 저항하는 메시지로 읽힌다. 이 시 전체를 지배하는 무기력한 병적 이미지만으로 이 작품을 본다면, 그러한 무기력과 병적 이미지 너머에 있는 것을 볼 수 없게 된다. 이 작품에는 무력감과 절망감만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무력감과 절망감을 낳는 계기와 이유들이 드러나 있다. 실업으로 드러나는 자기실현의 불가능, 군중 대 개인으로 대립되는 인간관계의 파행, 기계에 의한 일자리의 대체 등을 직시하는 주체의 자리가 이 작품 속에는 들어 있기 때문이다. 김용희는 이 작품의 화자가 보이는 이 무기력한 태도를 "시인은 사물의 본질보다는 현상의 흐름을 고현하는 자세로 취하며 변화하는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려 한다"고 지적하면서 「황혼」 속에 나타난 절망과 무기력을 오장환 초기 시가 보여 주는 권태이자 포즈로 규정한다. 또한 포즈는 낭만적 허무 주체가 근대적 자아의 균열임과 동시에 미적 균형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보았다.24) 사물의 현상을 고현하는 자세로 보고 있다거나 무기력과 권태까지도 포즈라고 한 지적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김용희의 이러한 지적은 무기력과 절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작품의 잉여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수긍할 수 있다. 현실에 대한 부정의 태도로서 절망감이나 무력감조차도 저항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시의 화자는 단순히 무능력한 주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절망감과 무기력에 빠지는 것과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주체의 저항은 부정적인 현실의 인식과 함께할 때에만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차원에서 볼 때, 개인과 역사의 진보는 미래적 지향의 새로움만으로 마련되지 않으며, 오히려 현실에 대한 비판의 충실함을 통해서 확보되는 것이다.(p. 시 210-211/ 론 211-212)

 

  * 24) 김용희, 『식민지 지식인의 근대 풍경에 대한 내면 의식과 시적 양식의 모색- 1930년대 오장환의 경우』, pp. 25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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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현승_한국 현대시의 화자 연구『얼굴의 탄생』에서/ 2020. 12. 30. <파란> 펴냄

  * 이현승/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고려대학교에서『1930년대 후반기 한국시의 언술 구조 연구  백석 · 이용악 · 오장환을 중심으로 』로 박사휘위 받음, 한경대, 경희대, 광운대, 중앙대, 고려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고려대학교 BK21 한국어문학 교육연구단, 민족문화연구원의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가천대학교 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