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보이들의 누님 비보이들의 누님 정숙자 그들의 언어는 누님의 것이었다 누님은 그윽히 앉아 아리랑을 불렀지만 어깨 밑 편자(編者)와 여러 날개가 아득히 먼 길 트고 있었다 까마득한 그때 누님은 오직 현재와 미래를 아우들에게 걸었다 뿐일까? 더 멀게는 증손자에게까지 덩굴을 불어넣었다 조선의 누님들의 오랜 .. 그룹명/나의 근작시 2011.02.27
멜랑꼴리커 멜랑꼴리커 정숙자 하루 사이로 백년이 지나간다 지금은 오후 세 시, 칠십 혹은 육십 년의 시간이 허리를 끈다 딱히 이유가 낀 것도 아니다 다만 백년이 덮쳤을 뿐 내 쉰아홉의 길목이건만 엉뚱한 사태가 침범-일초일순을 가로막는다 하루에 백년이 머문다는 건 참으로 괴이쩍은 일 하지만 누가 이해.. 그룹명/나의 근작시 2011.02.25
정6각형의 사회 정6각형의 사회 정숙자 변-1 점심에 삶은 계란 한 개를 먹었다. 그리고 지금 석식으로 또 한 개를 먹는다. (고기 대신) ‘닭~알=달걀’을 먹는 까닭은 내 허술한 뇌를 지키기 위해서다. 단백질이 부족하면 뇌 속 날개가 퇴화된다는 풍문이 있어 에라! 선수를 치는 것이다. 닭을 새(鳥)로 봐주지 않는 작.. 그룹명/나의 근작시 2011.01.13
희망값 희망값 정숙자 (모든 지불은 비스킷으로…) (사랑하는 비스킷, 오래도록 사귀어온 비스킷) 그것은 꿈에 대한 대가이니! 바람만으로 띄울 수 있는 게 꿈이라고 여기지 마라 뜨겁게 바삭하게 고소하게 구워진 고독, 고뇌, 고전을 지불해야만 얻어지는 백화점에서는 골라올 수 없는 신의 상품 세일은 없다.. 그룹명/나의 근작시 2011.01.12
외상 후 해피니스 증후군/ 정숙자 외상 후 해피니스 증후군 정숙자 불행이 빠져나가자 행복만이 남았다 잠깐의 햇빛 그냥 놔두면 되는 일이었다 스스로 공들여 살고 멀리 있는 것 너무 아득한 것 바라지 않음이 더! 더! 더! 바라지 않음이 여유이며 자유이며 유유이며 그 여여가 다행의 본적이었던 것이다 죽도록 괴롭거나 슬펐던 밤은 이미 소유한 것에 대한 값어치 헤아리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삶은, 삶 자체만으로 화뢰(花蕾)라는 걸 감촉하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행복이란 행복하다는 느낌과 여김에 있다 지나갔거나 다가올 한때가 아닌 바로 지금 ‘이 행복’ 속에 ‘그 행복’이 산다 *『다시올문학』2010-겨울호 그룹명/나의 근작시 2011.01.07
기적의 진행 기적의 진행 정숙자 죽음은 푸른빛이죠. 죽음은 오직 푸른빛이죠. 죽음에 빠졌을 때, 아니 빠졌다 나온 다음날부터 죽음에서 풀려나오는 모든 빛을 보았죠. 죽음에서 방면되어 예전에 걷던 산책로에 들어섰을 때, 너무도 환한 노란빛이 피어 있었죠. 그 노란빛은 개나리꽃이라는 별들이었죠. 그리고 .. 그룹명/나의 근작시 2011.01.07
몽상문 몽상문 정숙자 재빨리 낌새를 알아차린다 지체 없이 행동한다 지그재그로 포물선으로 종횡무진 피한다 꺾었다가 폈다가 고꾸라졌다가 돌다가 쓰윽 항로가 사라진다 하지만 이내 다시 나타나 내 손에 들린 전자 모기채에 ‘딱’ 소리와 ��께 생을 마감한다 불과 몇 초일지라도 하루살이인 그에게는.. 그룹명/나의 근작시 2010.11.19
돌아온 아침 돌아온 아침 정숙자 너무 자주 너무 오래 고통을 노래했습니다 허다한 기쁨 외면한 채 굳이 고통만을 쓰다듬었습니다 기쁨을 굴리기보다 괴로움을 깎는 편이 더 가치일 거라고 고뇌와 인내를 헤아리는 게 진정 노래일 거라고 줄곧 심장을 꼬집었습니다 이제 인생을 세상을 구름을 노래해야겠습니다 .. 그룹명/나의 근작시 2010.11.10
blue coip blue chip 정숙자 검은 색은 가장 먼 곳이죠 언니가 그랜드캐년 여행할 동안 저는 검은 색에 다녀왔어요 검은 색은 모든 색을 차단합니다 초록은 물론 빨강도 지워버려요 묻어버려요 태워버려요 검은 색에 다녀오기란 쉽지 않답니다 검은 색은 먼만큼 깊고 아늑해요 돌아올 수만 있다면 당신에게도 ‘검.. 그룹명/나의 근작시 2010.11.08
죽음의 곡선 죽음의 곡선 정숙자 직선의 한 끝은 코너다 직선의 다른 한 끝은 삶이며 양 끝이 맞닿은 그 직선은 원으로 복귀한다 발자국과 발자국을 잇는 직선 하나하나가 인생을 그려나간다. 고유한, 비슷비슷한 발자국 위로 다른 발자국이 포개지는 동안 아장아장 세워졌던 최초의 직선들은 꼬부라지거나 시들.. 그룹명/나의 근작시 2010.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