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pen
정숙자
눈곱 없는, 눈곱 안 나오는 볼펜은 좀 없을까?
문득문득 행간에 줄 긋다 보면 뭉텅뭉텅 몰려나와 뭉개져 버리는 밑줄. 백합 이미지로 태어난 책들. 물러터진 그그그 눈곱에 질려 번번이 진-면목 놓치고 마네. 핵 개발보다 우주선보다 급한 게 볼펜이지. 그거 하나 밉게 만들어 민들레값에 공급하지 못한다면 과학은, 문명은 한참 더 의지를 불태워야 해. 몇 해고 몇 달이고 지새워야 해. 책 & 노트들은 분연히 집합/궐기해야 해.
(그런데, 책과 노트가 어떻게 분노하지?)
(그래서, 이렇게 궐자가 출렁이는 거야?)
반듯한 사각, 순백의 여백, 정중동의 강변, 두루미 날개··· 장삼이사의 슬픔이든 사농공상의 뼈저림이든 비운의 소나무 용틀임이든··· 한 지붕 금언/시편이거늘. 요요요 묽은 빨간 눈곱이 태연자약 개칠하다니! 어느 날 우주, 아니 지구 소멸의 날. 그 모두 태양풍의 낙엽으로 구를 테지만, 문득문득 읽던 책 들여다보며 에그머니! 몹시도 기다려지는 맑은 눈빛 red-pen 장미 한 송이.
이 얼뜬 바람, 어떤 신 깊은 산에 손 모아 얻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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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 2021-여름(8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