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간의 첫발
정숙자
시간은 매 순간 첫발이다
1초도 낡지 않는다
다가오는 순간만이 아니라
지나간 여름조차도 늙지 않는다
우리를 에워싼 모든 사건은 첫 순간의 색채로 한자리에 꽂혀있다. 닳거나 늙는 건 바로 우리의 육체, 우리의 혼신을 탐탁잖게 여기는 사물들, 그리고 그들과 우리의 그림자라 해두자, 이름하여 시간이 흘러드는 입, 설령 주둥이가 없는 광물일지라도 그들을 꿰뚫고야 마는 시간은
첫발밖에는 없다. 영원히 신생아이며 미성년인 그는 또한 얼마나 무심하고 부질없고 청초한가. 간혹 우리 앞에 얼마나 눈부신 아침과 푸른 구름을 부려놓는가. 그에게 두 번째 걸음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삶에 좀 익숙해졌을까. 모든 시간이 첫발이니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대칭은 비대칭일 뿐, 비정상은 비정상일 뿐. 비대칭이 비정상인 건 아니다 라고 흘려도 될까. 시간과 길, 시간과 벽, 시간에 묶인 일생은 비대칭일 뿐 비정상인 건 아니라고 새겨도 될까. 아무리 꽃다운 불을 지펴도 데워지지 않는 이 시대의 벽난로 위엔 여전히 첫발뿐인 시,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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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창작』 2021-봄(1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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