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사> 中
우리는 상상인이다(부분)
염창권/ 본지 주간
내 앞에 길이 있다.
잘못 든 길은 어느 집 현관 앞에서 끝장이 난다. 나아갈 길을 다시 찾아야 한다. 나는 조직에 속해 있었고, 그들과 함께 걸어야 했다. 보조를 맞추어 지체된 발걸음을 부축해야 했다. 늦게 온 사람이 크게 주장했고 또 자기 것처럼 가져갔다. 잘못 든 길도 애써 따라다녀야 했고, 그들이 아니라고 했을 때라야 나도 아니었다. 내가 꿈꾸는 길은 나 혼자 걷는 것이다. 나마의 보폭과 속도를 걷고, 나만이 형성할 수 있는 상념을 존중하고, 스스로 존중받는 길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한 시기가 오고, "나 때는"과 같은 보수적인 가치를 방어논리로 삼아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멀지 않다. 정신이나 판단 자체를 부축받지 않는 시간, 상호 주관성을 인정하고 확대해나갈 수 있는 그때까지가 상상인으로서의 내 몫이 남겨져 있다고 본다.
지금 내 앞에 놓인 길은 사유지로 가로막혀 있다. 강원도의 창작실과 제주에서 단기 체류하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길은 길에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연결되기를 거부하는 길은 산자락으로 올라갔거나 사유지임을 주장한다. 닫힌 길이다.
상상인! 창간을 통해 함께 만나는 상상인은, 범주적인 사고를 한사코 거부하는, 낯선 관념을 즐겨 창출해 내는 문화적 창조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p.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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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인』 2021-1월(창간)호 <상상인 프롤로그>에서
* 염창권/ 1990년 ⟪동아일보⟫로 시조 부문 & 1996년 ⟪서울신문⟫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 『마음의 음력』 『한밤의 우편취급소』 등, 평론집 『존재의 기원』, 현) 광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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