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에게
기혁
여름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잠든 개에게서
독신(獨身)이라는 말을 배웠다
하나의 원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건 편파적인 생애
매일 밤 수직의 고단함을 은폐하던 양초와
떨어진 후에야 벚나무의 내력을 각주로 덧붙이던 벚꽃처럼
외로움이란 연필심 묻어나는 모양자를 가져갈 뿐
변명의 궤도를 그려 오지 않는다
눈감지 못한 혈육의 눈꺼풀을 쓸어내릴 때
동공의 연륜을 따라 반짝이던 별빛들이 물이 되어 흘러
내린다
홀로 마신 저녁을 게워 낸 물새가
눈 속으로 들어온 별빛을 뒤적거리며 날아가는 곳,
지구라는 푸른 경이(驚異)를 한 장 엽서로 보내온 오빠
에게
누이는 자신의 화법이 우주 비행사의 두 눈을 닮아 있
음을 슬퍼한다
객사란 직계의 시신을 대문 앞에 두는 풍습을
원근(遠近)이 어긋난 삶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으나
서로를 침범하지 않을 만큼만 나이테를 늘려 가면
익숙한 곳에서부터 길을 잃곤 했다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한평생 대문을 열고 잔 노모(老母)가 사방을 걸어 잠근 채
동공 속에 떨어진 연필심을 털어 낸다고
되돌아온 손을 잡으면 중력이 없는 슬픔에도 눈물이 고
였다
서로 다른 윤곽으로 맴도는 우주의 한 이름, 미아
일생에 두 번 타인의 원주를 지나야만 한다
-전문,『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2014, 민음사)
▶ 파편 속에서 꺼내는 존재와 존재자들 _ 정숙자
생물 분류학상의 <종·속·과·문·강·문·계>에서 하나의 개체는 파편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하나의 파편은 모든 유기체와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삼라만상과도 그물코를 형성하고 유지해나간다. 가시권 밖 결속에서도 인간은 가장 높은 단계의 종으로서 타 유기체가 따를 수 없는 복잡다단한 유전자를 확보했고, 따라서 자연선택의 차원에서도 단연 으뜸 생명체로 살아남아 만물을 이용하고 운용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인간 종에게 멈춤이란 있을 수 없다. 종족보존의 자연 순환인 출산과 죽음만으로는 만족도 방치도 허용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경쟁하고, 경쟁하며 미래를 앞당긴다. 이 발빠른 종에게 별난 두뇌가 주어진 만큼 형별 또한 상상불허의 가혹을 면치 못한다.
현실과의 불화 끝에 예감하게 되는 고독… 문득 맞닥뜨리게 되는 고독… 긴긴 성찰의 길에 안내자가 되어주는 고독…. 이 고독의 해안에서, 혹은 그 고독의 삼림(森林)에서 인간은 세상과 삶, 동종인 인간, 그리고 사물을 다시 읽고 재해석하며 새로운 자아를 낳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죽는 날까지 반복/번복된다. 더욱이 글 쓰고 책 읽고, 더 나은 자기분만을 위해 사유하는 인간이라면 거의 사건지평선에까지 도달할 정도로 보폭을 늦추지 않는다. 여기서, 시인 기혁은 ‘개’라는 포유동물의 고뇌를 마주한다. “여름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잠든 개에게서/ 독신(獨身)이라는 말을 배웠다” 화자가 개한테 ‘독신’이라는 어휘를 부여할 때, 그 개는 이미 가축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이며 존재자다.
“어떤 것이 어떤 식으로 느껴진다는 것은 복잡한 인지과정의 결과이지 개별적인 인지상태로 ‘읽어지는’ 속성이 아니다”(앤드루 브룩·돈 로스 편저『다니엘 데넷』82쪽. 석봉래 옮김, 2002. 몸과마음). “여름내 제 꼬리를 물고 잠든 개”에게서 ‘독신’을 감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계절을 감각하고 인지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관조의 경지에까지 다다라 감각질의 경계가 남다른 인식을 응시하는 순간이다. 사실상 ‘미아에게’는 내용으로 볼 때 첫 연에서 끝나 있다. 더 이상의 말을 붙이지 않아도 “여름내 꼬리를 물고 잠든 개”의 이미지는 원(員)을 이룬 상태, 즉 처음과 끝이 화해된 지점이다. 하지만 “내적 감각은 외적 기준을 필요로”(같은 책 104쪽. 비트겐슈타인의 말)하기 때문에 여타의 사물과 상황을 펼치며 리좀적인 플롯을 보여주었다.
“꼬리를 물고 잠든 개”의 구심(求心)에는 “편파적인 생애”와 “변명의 궤도” “눈감지 못한 혈육” “직계의 시신” “노모" 등, 한 생애와 여러 삶이 감정 배제한 언어로 적재되어 있지 않은가. 마지막 연에서 “서로 다른 윤곽으로 맴도는 우주의 한 이름, 미아/ 일생에 두 번 타인의 원주를 지나야만 한다”에서 “두 번 타인의 원주를 지나야만” 하는 까닭은 생(生)과 사(死)의 경로일 것이다. 그러므로 <미아에게>라는 제목 또한 정합적이라 할 만하다. 웅크리고 잠든 개에게서 이토록 심오한 동그라미를 건질 수 있는 사색은 얼마만큼의 의식탐사와 심중의 항해에서 얻어지는 것일까. “예술적 실재는 영혼의 표현 수단”(에마뉘엘 레비나스『존재에서 존재자로』89쪽. 서동욱 옮김. 2012_9쇄. 민음사)이라고 하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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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진『시인광장』 2017-1월호 <포엠조명>에서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열매보다 강한 잎』『뿌리 깊은 달』외 6권, 산문집『밝은음자리표』『행복음자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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