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사 리바이벌 - 다시 읽어보는 오늘의 명시집!!!>
물을 만드는 여자
문정희
딸아, 아무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마라
푸른 하늘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러고는 쉬이쉬이 네 몸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전문-
▶ 신화소로서의 모성과 물의 이마고(imago)_정숙자(시인)
어제(2016.2.11.현지시간), 정확히 101년 전에 아인슈타인이 발견했던 중력파의 존재가 입증되었다고 미국국립과학재단이 발표했다. 중력파란 두 개의 블랙홀이 충돌할 때 일으킨 파동에 의해 주변의 시공간이 일그러지는 현상이라는데, 이번에 탐지된 중력파는 약 13억 년 전 태양의 질량 36배, 29배인 블랙홀 두 개가 합쳐지는 과정에서 약 0.15초 간 방출된 것이라 한다. 이는 우주과학사의 쾌거로서 전 세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끊임없이 추정하고 확인해나가는 과학에 반해 신화는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초월적 진리로서 전 인류의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준다. 언어만이 다를 뿐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신화를 갖지 않은 나라란 없다. 그리고 그 꼭짓점에는 으레 천지(天地)와 생명을 관장하는 신들이 위치한다. 그렇지만 신이나 피조물보다도 먼저 전제되어야 할 요건이 자연 즉 ‘물’이 아닐까 싶다. 까닭에 화성 탐사선 큐리오시티가 보내오는 ‘물’ 혹은 ‘물의 흔적’이 담긴 정보는 매번 NASA의 연구진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관심사가 되고는 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문정희 시인의 「물을 만드는 여자」는 대지신의 은유이며 생명 보전의 모성을 바탕으로 한 원형적 모나드로 읽힌다. 이 시에서 ‘오줌’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소유한다. 그것은 순수한 “야생의 물”(『식물의 잃어버린 언어』스티븐 헤로드 뷰너, 박윤정 옮김, 2005. 나무심는사람)일 수도 있고, 대지의 동력으로써 없어서는 안 될 온기를 내포할 뿐더러, 배설이라는 갈래에서는 ‘말’일 수도 있다고 본다. 언어야말로 우리의 사고영역을 비옥하게, 새롭게 하며 진화와 활력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씨앗인 물이 땅의 품에 스며들어 생식이 정상적으로 이루어”(『물의 신』마르셀 그리올, 변지현 옮김, 2000, 영림카디널)지며, “우주만물에 필수적인 말(parole)”(같은 책)이 있음으로써 신과 인간의 유대는 유연성을 유지함과 동시에 돈독해진다. 더욱이 신과 인간의 중간자로서의 시인은 마땅히 글로써 자연을 재현할 수 있고, 그 미메시스는 미덕에 속할 것이다.「물을 만드는 여자」에서의 여자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심상이자 신화소(神話素 : mythmes)임을 뉘라서 부인할 수 있겠는가.
신화와 과학은 우주 탄생과 생명 기원의 시점에서 논구되지 않을 수 없는 양대 축이다. 그런데 과학의 경우 숫자가 아니고서는 논의되거나 표기할 수조차 없지만, 신화는 계산하지 않아도 너끈히 수렴되고 표현된다. 더 이상 추정-증명되어야 할 잔여도 없다. 그러므로 분명 신화는 과학을 초월한다. 상상력 안에서 충족되고 해소되며 꿈을 가동시킨다. 그러나 어제, 1피코초 사이에 발생했다고 보도된 중력파 또한 장차 우리에게 어떤 편리함을 제공하게 될지 자못 기대되는 바 없지 않다.
육안 천문학, 망원경 천문학, 전파 천문학, 중력 천문학의 역사로 기록될 거라고 한다. 하지만 과학이 어떤 벡터로 내달리든 신화는 변함없이 둥글고 폭 넓으며 따뜻한 모성으로서 우리의 갈증과 구슬픔을 달래줄 것이다. “몸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새 잎이 돋고 딸들은 비로소 “대지와 한 몸”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 속에서 물줄기는 더욱 푸르른 내일을 잉태할 것이고, 상위모방 차원에서의 신화소 또한 원형으로서의 격조를 오래도록 잃지 않을 것이다. ▩
*『시사사』 2016. 3-4월호(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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