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작품론

정숙자_ 나의 시론 : 의식하는 손, 지각하는 눈

검지 정숙자 2016. 2. 18. 11:19

 

 

    시와표현』2016-2월호 / 중견 시인 초대석 _ 나의 시론

 

 

     의식하는 손

          지각하는 눈 

 

    정숙자

 

 

   시와 시론과 삶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있는가. 시와 시론과 삶을 따로 나누어 호흡할 수 있는가. 혹은 시와 시론과 삶 가운데 어느 한쪽에서든 중량을 덜어낼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가끔 자신에게 던지곤 한다. 왜냐하면 시와 시론과 삶이라는 구획에서 어렵지 않은 파트란 없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시와 시론과 삶’이라는 경계 자체가 아예 틀린 어법인지도 모른다. 시와 시론과 삶은 한 톨의 씨앗에서 폭발한 줄기들이 아닌가. 그 줄기들의 일사불란한 협력 아래 태양도 땅 속 깊이 손을 넣어볼 수 있지 않은가.

   의식에서 지각으로, 지각에서 지향으로의 벡터가 펼쳐지려면 온몸의 집중 / 열중이 필요조건이다.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주 또한 그런 엄밀성으로 존재해왔고 또 운행되어질 것이다. 우연이라고 느껴지는 행성의 충돌이나 보이드 스페이스, 기후변화, 화산폭발, 해일에 이르기까지 우주 자체의 차원에서는 계획된 알레고리일 거라고 여겨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의 모방을 논한 의미는 가시적인 재현이나 복제보다는 눈에 띄지 않는 영원성이라든가 순수, 더 나아가 불변에 포함되는 가치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가 길을 가다가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하자. 그 파장이 어디까지 번져나갈까. 백 미터? 이백 미터? 천 미터? 그건 우리들 청각의 한계일 뿐 우주 전체에 주름이 밀린다고 한다. 혹 그것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필자는 그 추론을 수용하고 참작하며 자연을 대함에 있어 신중을 기하려는 편이다. 개인의 사소한 동작까지도 이렇듯 우주와 뗄 수 없는 관계라면 어찌 시와 시론과 삶을 분리할 수 있으리오. 시란 의식의 산물이며 의식은 삶에서 습득되는 것이고 그 의식의 골짜기에서 움트는 것이 시상(詩想)일 테니 말이다.

   “의식은 대상을 한정함으로써만 존재하기 시작할 뿐이고 ‘내적 경험’의 환영조차도 외적 경험에서 빌려옴으로써만 가능할 뿐(『지각의 현상학』p.72. 류의근 옮김, 문학과지성사)이라는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주의가 명징하게 다가온다. 어떤 시인이 제아무리 뛰어난 작품을 발표했다하더라도 “그것은 의식의 최초의 윤곽 속에 함축되어 있(같은 책, p.77)었던 지각과 인식, 그리고 다양한 작법의 구조를 통해 촉발된 결과물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가장 염두에 두는 사안은 현장 파악이다.

   현장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전후좌우의 분별과 방향 설정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워지는 물결 속에서 ‘무엇이 어떻게 새로워지고 있는가’를 관찰 / 반성하지 않는다면 새 물결의 일원으로서 합류하기는커녕 안이한 분자에 섞여 더 이상 흐를 수 없는 물웅덩이가 되고 말 것이리라. 따라서 ‘대상을 어떤 구조로 구슬려 낼 것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닫혀버린 나머지 현상 저 너머로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한 채 소박비평이나 인상비평, 혹은 호의비평의 소재를 제공하는 차원에 머물고 말 것이리라.

   안중근 의사의 유묵, 일일부독서면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이라 했거니와 나 자신에게 빗대자면 일일부독서면 연중생형극(一日不讀書 硯中生荊棘)으로 새겨볼 수 있음직하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벼루에 탱자나무가 진을 칠 것이니 어떻게 먹을 갈고 붓을 적셔볼 수 있겠는가. 우리가 꼭 슬라보예 지젝이나 롤랑 바르트, 질 들뢰즈나 비트겐슈타인 등 철학동네 석학들을 두루 섭렵해야만 가작(佳作)과 이퀄관계가 성립되는 건 아니지만 경작해야 할 원고지 칸칸마다 자양분으로 작용하리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달밤을 가로지르는 게 기러기, 또는 고향생각이던 콘텐츠는 페이지가 낡은 지 이미 오래다. 뚫고 나갈 수 없는 장벽 앞에서도 양자역학의 터널링(tunneling)을 연상하는 게 오늘의 풍속도다. 나 스스로 원전(原典)을 읽지 못해도, 번역서가 많으니 그 아니 다행인가! 축복인가! 고마움인가! 책, 시력, 정신력만 유지된다면 천년이라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 필독서 중에 잡지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게 또한 필자의 견해다. 잡지야말로 발표의 장(場)이며 잡지가 없다면 현장 파악은 고사하고 문학 공동체 자체가 사라지고 말 터이므로 잡지의 중요성은 누누이 방점을 찍어도 잉여가 아닐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진검이란 무엇일까. 독서란 칼날을 숫돌에 가는 행위와 다름 아니다. 한 자루의 칼을 끊임없이 숫돌에 문지른다면 어느 땐가는 넓었던 칼날이 칼등에 닿으리만치 야윌 것이다. 그렇지만 서슬은 더욱 빛을 머금어 어떤 뼈라도 날렵하게 추려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채근과 함께 본래 어리석은 필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점점 구제불능의 간서치가 되어간다. 비록 자신은 어리보기일망정 수승한 지성의 말씀을 듣는 슬하이므로 시종여일 꿇은 무릎, 책 앞에 공손할 따름이다.

   시와 시론과 삶이 분리불가의 신체인 바와 같이 의식-지각-인식 또한 공시성 통시성이 한데 어울려 발현 / 현현되는 거라고 본다. 불가(佛家)에서 표상하는 ‘천수천안’ 역시 창작의 원리에서 들여다보면 아득한 외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 의식 전반을 형성하는 인자 하나하나가 눈과 손이 되어 영감을 불러오고 기법을 이끌며 문장을 돌보는 게 아니냐 싶다. 나에게는 손수 꿰맨 29㎝×29㎝의 방석이 하나 있다. 오랜만에 솜싸개를 꺼내어보니 서툰 붓글씨가 아직도 선명하다. “책은/ 나의 스승이시니// 없는/ 솜씨로나마// 비단 방석을/ 지어 올리네. 1984.11.5.”  ▩

 

                                               

   *시와표현』2016-2월호 / 중견 시인 초대석 _ 나의 시론

  * 정숙자/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