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의 형식들』이성복/ 발췌
* 세상을 꿰뚫는 공정한 사명이 없다면, 내 몸을 사명의 근거지로 삼아 움직이는 몸이 시로 포착되도록 하자. 그리하여 나는 '사람은 시 없이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신 없는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내 안에 살고 있는 죽음이 바로 시이기 떄문이지요. (p58 … 59)
* 좋은 시, 그것은 당연히 감동을 주는 시일 테지요. (… ) 가령 어떤 시가 다만 기발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꾸며져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것이 좋은 시일까요. 물론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 시가 다만 멋진 이미지들의 결합이라 한다면, 그것이 장식품이나 공예품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저는 아름다운 몇 개의 이미지를 잡아내기 위해 시를 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는 우리와 세계의 새로운 관개 맺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p64 … 65)
※※※ 우리의 행복, 그것은 오직 우리의 불행의 그림자로서만 존재합니다. (p-68)
* 물론 꼭 전달해야 할 무엇도 없이 난해할 경우 그 난해함은 마땅히 거부되어야 될 성질의 것이지요. 그러나 무엇인가 꼭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면, 그 난해함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지, 그것을 시의 민주화라는 과제로써 배척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p-75)
* 시인은 어떤 비전이나 유토피아를 그려내는 일뿐만 아니라, 자기 체험의 살(肉)을 보여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이 독자에게 주는 것은 딱딱한 관념의 덩어리가 아니라, '이는 내 살이니 받아먹어라' 할 때의 바로 그 '살'이지요./ 물론 시인과 독자의 관계는 무엇을 '베푼다' 하는 식의 수직적인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자기 몸을 허락하듯이 독자에게 시를 내주는 것이며, 한 편 한 편의 시를 통해 그가 사회에 진 빚을 조금씩 갚아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빚을 완전히 청산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겁니다. (p-79)
* 시인은 어디서나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한 절망에 대한 위안은 더 큰 절망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비관적인 믿음인 셈이지요. (…) 무의식적으로 어떻게 스며들었는지 몰라도 의식적으로 초현실주의 쪽으로 눈을 돌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에게 부족한 것은 현실이고, 현실보다 더 초현실적인 것은 없다는 다짐을 늘 하고 있습니다.(p-82)
* 이제 나는 시 쓰기를 내 인생의 성패의 담보로 선택한다. (p-83) // 시 쓰는 이 자신의 삶이 담보되지 않은 시는 잔고가 없이 발행되는 수표와 같다. (p-166)
* 그들 자신은 삶을 보는 눈이 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삶은 도덕 교과서에 실려 있는 삶이다. 그들은 '정직한' 예술가들이다. 정직하다는 것만큼 예술가에게 경멸적인 말은 없다. (p-85)
* 언제든지, 비록 그것이 내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올지라도, 솔직해지려는 노력. (p-91)
※※※ 쓰고 있는 글에 자신이 없어질 때, 혹은 글로 써야 할 아무런 현실이 없을 때, 사람들은 과도하게 현실묘사에 치중하거나, 아니면 현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경멸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자신에게 없는 현실을 위장하려 든다. 그럴 때 나오는 문학은 남이 애써 찾아낸 이미지를 차용하고, 남이 (그의 싸움으로써) 만들어 놓은 생각의 틀을 훔치며, 거기에 적절한 분위기를 덧씌우는 것이다. 문학은 영혼의 싸움의 결과이다. 이미 발견되고 고정된 것은 살아있는 진리가 아니다. 작가는 매순간 자기 죽음을 죽어야 한다. 진실한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면제하려 드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문학은 영혼의 갈등에 의해 태어난다. (p-93)
* 글이란, 영혼의 진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몇십 년씩 써도 씨도 먹히지 않는 시를 쓰면서 그래도 손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안타까운 것이다. 나를 포함해 우리나라 시인의 태반은 시가 되지 않는다. 우선, 사회학적 상상력을 내세우는 시인들에게는 갈등하는 영혼이 없다. 그들에게 영혼은 금기이다. (p-101)
* 희망은, 그것이 바늘구멍만한 것이라 하더라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틈새를 만든다. 역사와 문화의 진보는 그런 구멍의 흔적들이다. (… )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잘못이 아니듯이, 허락되지 않은 재능으로 인한 변변찮은 결과는 내 탓이 아니다. 그러나 희망이라는 구멍 앞에서 망설이거나 물러나는 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절망이 죄가 되는 것은 나태와 타락을 부르기 때문이다. (p-104)
* 문학은 그 자체로 실체가 아니다. 문학은 현실로 들어가는 문일 뿐이다. 문학을 신줏단지 모시듯이 하는 사람이 배신당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문학이 중요한 것은 삶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삶을 꿰뚫어 보는 '눈'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지상주의자들은 이 점을 유념하지 않는다. 그들은 삶 대신, 문학이라는 우상을 떠받들다가 목숨을 잃는다. (p-105)
* 나는 문학보다 철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 ) 철학적 글쓰기와 달리 문학적 글쓰기에서는 피와 정액, 똥과 오줌 등 사람의 신체나 노폐물들을 감시받지 않고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는 내 시에 동원된 육체의 세부들이 거칠고 과장된 액세서리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요즘 내가 나 자신의 글쓰기나 남의 글쓰기에 흥미를 잃고, 문학적 글쓰기보다 철학적 글쓰기에 더 끌리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p-108)
* 예술에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태도는 깊은 샘을 파내려 가는 데 결정적인 장애가 된다. 대체로 쉽게 뜨거워지는 것들은 쉽게 식는다. 높은 산은 밋밋하게 올라가며, 깊은 강은 완만하게 흐르는 것이 자연의 생리이다. (p-110~111)
* 글은 한 눈금도 더할 수도 뺄 수도 없이 자기가 살아낸 만큼 쓰는 것이다. (p-113) // * 시는 몸으로 살아낸 만큼 쓸 수 있는 것이니, 덤도 에누리도 기대할 수 없다. (p-165)
* 인류 최고의 고안은 '부재'의 발명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 문학이 소중한 것은, 검은 보자기 속 어둠으로 들어가 스위치를 누르는 옛날 사진사처럼 한순간 한순간 불가능을 기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p-123)
* '물집'이라는 말은, 십여 년 전 우연히 읽은 불교 책에서 공(空, shunyata)이라는 말의 본래 뜻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 (p-129)
* 시에서는 착안이 절반이다. (p-165)
* 기술은 이미 정신이다. (p-166)
* 사람의 지옥은 시의 낙원이다. (p-166)
* 오백만 원으로 일억오천만 원짜리 물건을 사려는 것은 무리이거나 사기이다. 건전 기업은 부채와 자본의 비율이 삼 대 일 정도라 하는데, 이 역시 글 쓰는 사람이 새겨 볼 일이다. (p-184~185)
* 자기 자신에 사로잡히면 번뇌이고, 남을 생각하는 것은 평화라는 것도 염두에 둔다. (p-217)
* 그저께는 프랑스 티브이(tv) 채널에서 키냐르의 대담을 보았는데, 이번에 발간된 그의 작품이 단상, 환상, 회상 등 갖가지 글쓰기 방식의 혼합물이라는 것과, 글쓰기란 기본적으로 '읽기' 작업이라는 얘기가 인상적이었다. (p-225)
* 그저께 불교방송에서 달라이 라마의 인터뷰를 보았다. 대담자가 질문을 하였다. 아까 스님이 법문하시면서 '보리심(菩提心)' 운운하실 때 왜 안경을 내리고 눈물을 닦았는지 물었다. 정말 화면에서는 그 장면을 되풀이해서 보여 주었다. 스님의 말은 정말 '아, 이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아직 깨닫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보리심이라는 말을 할 때면 눈물이 나요. 보리심이라는 말은 한없는 기쁨과 연민을 느끼게 해 주지요." 그러면서 달라이 라마는 껄껄 웃었다. 그분이다. 그분이시다. 저렇게 아름다운 분이 세상에 계시다니. 그분이야말로 '큰바위 얼굴'이시다. (p-228)
* 오후에 말라르메 번역본의 해설을 읽었다. 잘 씌어진 글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머리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말라르메 연보에서 '허영심이 많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였다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p-229)
* 내가 어두워질 때가 바로 시가 밝아지리라는 것. 잊지 말자. (p-244)
* 예술을 할 수 있다는 것, 아니 예술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러나 그 행복을 정말 내 것으로 가지기 위해서는 고립과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고 맞아들여야 한다.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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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 『고백의 형식들』/ 2014.9.20 <悅話堂> 발행
* 이성복/ 1952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불문과와 동대학원 졸업. 1977년 시 「정든 유곽에서」를 계간 『문학과 지성』에 발표하며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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