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서 존재자로』 - 발췌
에마뉘엘 레비나스/ 서동욱 옮김
* 존재에 관한 물음, 즉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전혀 대답되지 못했던 것이다. 존재는 대답 없이 존재한다. 이 대답을 찾아내는 방향은 절대로 계획될 수 없다.[존재에 대한]물음이 존재와의 관계의 현시 자체이다. 존재는 본질적으로 낯선 자이며 또 우리를 거역한다. 우리는 밤처럼 숨막히는 존재의 악(Ie mai)이다. 만약 철학이 존재에 관한 물음이라면, 철학은 이미 존재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철학이 존재에 관한 물음 이상이라면, 그것은 철학이 이 물음을 넘어서게 해주기 때문이지 이 물음에 대답하게끔 해주기 때문은 아니다. 존재에 관한 물음 그 이상일 수 있는 것,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선이다. (P-30)
* 자기 안에서 자아는 반성될 뿐 아니라, 볼일이 있는 친구나 동료에 대해서처럼 자기와 관계한다. 자아와 자기의 이런 관계는 우리가 친밀(intimite)이라고 일컫는 관계이다. 자아는 순수하게 혼자가 아니며 순수하게 가난하지도 않다. 그에게 이미 천국은 닫혀 있다. 존재(existence)는 자신을 지칠 줄 모르고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했던 나르킷소스의 순진함과 달리 존재(existence)는 자신의 그림자에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 보지 못한다. 대신에 존재(existence)는[그의 모습을 비추어주지 않는]그림자와 더불어 자기의 순진함의 실패를 깨닫는다. 러시아의 유명한 이야기에 나오는 작은 바보 장, 단순하고 순진한 장은[계속 구걸하며 따라오는]자신의 그림자가 떨어져 나가길 바라고는 밭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 심부름으로 가져가던 점심을 그림자에게 먹으라고 자꾸 던져주었다. 이윽고 점심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는데도, 그림자는 마치 양도 불능의 최후의 소유물인 양 계속 그에게 붙어서 따라왔다.
존재(existence)가 질질 끌고 다니는 무거운 중량은 바로 그 자신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무거운 중량은 존재(existence)의 여행을 복잡하게 만들어버린다. 존재(existence)는 그 자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다닌다(omniamecum secum portans).* // (* 이 말은 키케로의 말 "나는 나 자신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다닌다(omniamecum porto mea). (p-41)
* 타인을 위한 수고는 경제적인 의미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보상되지 않는다. 나의 아이를 위해 수고하지만 그 수고에 대한 결과물을 나는 조금도 기대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즉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수고는 경제적 거래로 이해될 수 없다. 수고와 보상의 논리가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을 위한 수고는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자기' 자신보다 더 걱정하는 것이다. 미래는 오로지 이런 방식으로만, '타인이 누릴 삶으로서만' 나에게 찾아온다. 내가 죽더라도 내가 보살피고 중요하게 여기는 타인들이 그들의 삶을 살아간다면, 여전히 나의 미래는 지속되는 것이다. 이 미래는 아무런 규정도 되어 있지 않은 무한히 열린 미래, 전적으로 나의 규정을 벗어나 있는 시간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 자체이다. 홀로 있는 주체에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인다."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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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1905): 리투아니아 태생의 프랑스 철학자. 후설과 하이데거 밑에서 공부하고 프랑스에 이들을 최초로 소개했으며, 유명한 다보스 희의에서는 현상학을 옹호하는 등 초기엔 현상학자로 활동했다.그러나 이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무한을 향한 초월의 욕망을 밝혀냄으로써 현대 철학의 가장 전위적이고 대담한 입장을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벨기에 루뱅대학 철학과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세계의 문학》과《상상》봄호에 각각 시와 평론으로 등단했다. 저서로『들뢰즈의 철학-사상과 그 원천』,『자아와 타자-현대 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시집으로는『랭보가 시쓰기를 그만둔 날』『우주전쟁 중에 첫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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