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의 실재
한영미
무대 한가운데 상자가 놓여 있습니다 그가 내부를 열고 빈 속을 관객에게 확인시킵니다 그런 다음 나를 지목해 그 안에 넣습니다 상자를 닫는 동안 한 번 더 객석을 돌아봅니다 몸을 구부려 넣는 사이 자물쇠가 잠깁니다 인사가 장내를 향해 경쾌하게 퍼집니다 시작은 언제나 이렇게 단순합니다 그가 긴 칼 꺼내 듭니다 구멍이 숭숭 사방으로 열려 있습니다 하나씩 칼이 꽂힙니다 정면이기도 측면이기도 합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상자를 회전시키고 뒤집습니다 비밀 따윈 애초에 없었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다리가 잘리고 팔이 잘리고 마침내 소리 없는 비명이 잘려나갑니다 그가 동백을 생강꽃이라고, 씀바귀를 신냉이리고 주문을 욉니다 나는 생강꽃이 되어 생강 생각 바닥 두드리고, 씁쓸한 신냉이가 되어 신냉 신음 되어갑니다 실체도 없이 거대한 그가 나를 어디에나 있게 하고 어디에도 없게 합니다 칼은 탄식을 재단합니다 마술이 끝나면 나는 상자에서 걸어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웃어야 합니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닙니다 상자 속 한 여자를 잊어야 합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특별히 훌륭한 예술 작품은 한결같이 철학적 문제를 풍요롭게 환기한다. 철학이 인간의 의식을 논하고 예술이 의식을 포착한 것을 미학적으로 승화한다는 점에서 철학과 예술은 불가피하게 중첩되어간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예술은 '나'의 '최초'의 것을 펼쳐내는 객관화 작업이다. 한영미 시인은 이러한 '최초의 객관화'가 이루어지는 '나'에 대한 사유 과정으로 『슈뢰딩거의 이별』을 풀어낸다. 시인은 우리가 객관이라고 믿었던 것들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항대립의 사고방식을 벗어나려는 동시에 관계, 시간, 장소, 삶과 죽음에서도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허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그에게 모든 사물이나 현상은 '중첩' 상태에 있으며 '그러데이션' 된 것이다. 그러한 이해 방식은 자신의 시가 어떤 철학적 사유를 동반할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할 것이다.
*
「마술의 실재」는 시인이 쥐고 있는 처음이자 끝이요 그가 추구하는 시적 체계를 담고 있다. 시인은 시의 실재를 마술의 실재로, 시인의 삶을 마술사의 삶으로 보여주면서 시인의 묙망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상자 속 여자는 시인일 수도, 시인이 바라보는 시적 질료나 시어일 수도 있다. 마술사가 꽂는 칼에 잘려나가는 과정처럼 시는 자신의 것을 도려내면서 그 자리에 새로운 존재가 놓이도록 한다. 화자는 상자에 들어간 여자가 "이제 내가" 아니므로 우리는 "상자 속 한 여자를 잊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시는 시인이 자기 생각을 비워내려는 노력을 통해 '새로움'이 생겨나게끔 하는 과정을 함축한다. (p. 시 13/ 론 115-116 · 118-119) <염선옥/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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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슈뢰딩거의 이별』에서/ 2024. 7. 18. <문학의전당> 펴냄
* 한영미/ 서울 출생, 2019년『시산맥』으로 & 2020년 《영주일보》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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