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원형
유희경
할머니는 타래에서 실을 뽑으며 노래를 부르곤 하셨다. 나는 그 노래를 기억해본다. 그러면 할머니는 지긋이 바라보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실. 슬슬 풀려가는 실. 친친 감기는 실. 무언가 허술해졌고 그만큼 불룩해지고 할머니의 노래는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저 옮겨갈 뿐. 그 얇고 가는 사이. 아가.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본다. 창밖에는 늙은 나무가 있고 그것은 아슬하게 서 있다. 가을이 되면 저 위태로운 각도의 잎들을 모두 벗고 중심의 방향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쯤. 그렇구나.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그런 노래였나. 그랬구나. 머리를 만져주는.
-전문-
▶갱신과 반복, 무한無限(부분)_저자/ 시인
그간의 결과물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나는 매번 동일한 회의, "내가 시를 전혀 모르고 있다" 감각,에 사로잡혀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다. 마치 녹지 않는 막대사탕처럼 빼낼 때마다 그것은 거기에 있다. 놀랍게도, 어쩌면 놀랍지 않게도 나는 갱신되고 반복된다. 조금도 변화하지 않은 채. 다시 말해, 나는 시를 쓰기 시작한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번 서시序詩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무한無限, 이것도 깊이라면 깊이일 것이다.
*
뿐만 아니라 시 읽기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나는 여러 시인의 각기 다른 시를 읽지만 매번 기시감을 체험하곤 한다. 그것은 그의 것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다. 우리는 만난 적이 있고 그와 같은 체감이 없다면 '읽기'는 물론이고 '쓰기' 역시 불가능한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이야기. 그것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그런 것보다 거기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이야기가 빠져나간 다음이 중요하다. 갱신과 반복. 대체 무엇이. 책상 앞에 거울이 있었다면 그것은 깨어져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p. 시 236/ 론 23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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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3-11월(407)호 <시간성_나의 시를 말한다_11> 에서
* 유희경/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오늘 아침 단어』『당신의 자리 나무로 자라는 방법』『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이다음 봄에 우리는』『겨울밤 토끼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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