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송현지_쌓이(지 않)는 반복들(발췌)/ 리을 : 구현우

검지 정숙자 2024. 6. 13. 02:08

 

    리을

 

    구현우

 

 

  벽화마을을 일인一人이 배회하는데

  무슨 사연은 없다

 

  영혼을 잃은 월요일도

  친밀했던 이의 기일도

  아니고

 

  집에 돌아갈 기분이 아닐 따름이다

 

  일인一人은 독백한다

  영원히 죽지 않는 잉어가 그려진 계단에서

  내려가야 한다······

  

  오선지 같은 전선에 찢어지는 새털구름

  새는 보이지 않고 새소리는 들린다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일인一人 

  사람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사람을 본 적은 있다

  사람 같지 않다고 느꼈을 뿐

 

  담의 끝에서 잘린 그림이 다음 담의 처음과 연결되어 있다

 

  일인一人 독백한다

  태어날 때부터

  혼자는 아니었는데

  

  벽화마을은 다방면으로 열려 있고 그러므로 출구는 따로 없다

  지금이 아니야 지금은 아니야

  일인一人 

  자신만의 힘으로는 지나가기 어려운 골목을 지나간다

    -전문, 『현대시』 2023-10월호

 

  ▶쌓이(지 않)는 반복들(발췌)_송현지/ 문학평론가

  구현우의 「리을」에서 (···) 시인은 '일인一人'이라는 지칭을 통해 사회에 속해 있긴 하지만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한("태어날 때부터/ 혼자는 아니었는데") 그의 사정을 담는다. 집에 돌아가지 않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그에게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구절에 기대자면 그의 이러한 배회는 인간에 대한 깊은 실망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자신의 방황을 계속 이어나가려 했던 그가 ("지금이 아니야 지금은 아니야")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어느새 마을을 벗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가 이러한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이 마을이 벽화마을이라는 데에서 어느 정도의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담의 끝에서 잘린 그림이 다음 담의 처음과 연결되어 있"는 벽화들을 따라가면서 그는 정해진 출구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갈 수 있는 길이 "다방면으로 열려 있"다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된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누군가가 담과 담을 연결하여 그려놓은 벽화를 길잡이 삼아 "자신만의 힘으로는 지나가기 어려운 골목을" 비로소 지나갈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p. 시 219-220/ 론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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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3-11월(407)호 <현대시작품상 추천작을 읽고> 에서

  * 구현우/ 2014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나의 9월은 너의 3월』『모든 에필로그가 나를 본다』  

  * 송현지/ 202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