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다시 평온해졌다
조창환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가는 며칠 사이
여인은 잠깐 눈 한 번 떴다 감았을 뿐
의식이 없었다,
석션으로 가래를 뽑아낼 때도 반응이 없었다
고통스러운지 견딜만한지 알 수 없었다,
소변 줄로 오줌 뽑아내고, 산소호흡기로 숨 쉬게 하니
목숨 붙어있긴 하지만, 이 상태를 살았다 할 순 없었다
119 불러 구급차 타고 와 며칠 밤새운 남편과
소식 듣고 미국에서 급히 귀국한 자식들이
무거운 얼굴로 주치의를 바라보았다
흰 가운 주머니에서 흰 종이쪽지를 꺼낸 의사는
연명치료 거부 사전의향서에 사인한 뜻을
존중하고, 존경하고, 존엄히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남편도 자식들도 고개 끄덕이고, 싸늘한 손 잡고
가쁜 숨 쉬는 얼굴 오래 바라보았다
흰 가운 입은 의사가 사망진단 선언을 하기 직전
가쁜 숨 쉬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눈물 한 방울
눈가에 맺혀 흐르고
떨림도 멎고, 가쁜 숨도 멎고
창밖 바람도 멎고
바람에 흔들리던 나뭇잎도 멎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세상은 다시 평온해졌다
창밖에 바람도 불고, 나뭇잎 다시 흔들거렸다
-전문(p. 217-218)
-------------------------------
* 『시인하우스』 2024-상반기(창간)호 <시 3부> 에서
* 정채원/ 199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슬픈 갈릴레이의 마을』『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등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푸코와 열애 중/ 한소운 (0) | 2024.06.05 |
---|---|
내 안의 개를 죽이는 법/ 최형심 (0) | 2024.06.05 |
변명/ 정채원 (0) | 2024.06.04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9/ 정숙자 (0) | 2024.06.03 |
모퉁이/ 전순영 (1) | 2024.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