봇디창옷*
서안나
말은 사람에게 상처 입혀 무릎 꿇게도 하지만
봇디창옷은 아픈 곳을 감추는 소매가 긴 저녁이 되기도 합니다
점점 사라지는 제주어를 적어보는 봄밤
제주의 아이들은 정작 제주어를 모릅니다
나이 든 어머니와 옷장을 정리하다 낡은 봇디창옷에 손이 갑니다
봇디창옷에 뭉클거리는 오 형제가 검은 배꼽을 오똑 내놓고 누워 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할 말이 많아집니다
어머니의 제주어에는 뼈를 버린 사람이 삽니다
눈과 입에서 웃음이 먼저 번지는 어머니
세상의 모든 국경이 삶은 국수처럼 무너집니다
바람 든 콥데사니** 껍질 같은 어머니의 귀에서
아이들이 옷을 벗고 물뱀 되어 흩어지고
맞춤법에 걸린 바당과 할망당 심방***들이 제물 차롱을 지고
징게징게 꽹과리를 치며 걸어 나옵니다
어미가 물애기****에게 소매가 긴 봇디창옷을 입힌 마음
80년 된 콥데사니 같은 알싸한 제주어가
내 눈에도 뾰족하니 돋습니다
-전문-
* 봇디창옷: 귀한 아기에게 소매가 밤처럼 긴 옷을 삼베로 만들어 입힌 어미의 마음. 어미는 아기가 전생의 기억을 지우는 동안 깃과 섶을 달지 않고 기다리지.
** 콥데사니: 제주에선 콥데사니를 제사 음식에 쓰지 않지. 콥데사니라고 부르면 제주의 제삿날이 마늘처럼 매워지네.
*** 심방: 신을 모시는 심방들이 징게징게 굿하는 날 신도들이 준비한 제물 든 차롱을 굿당에 나란히 올린다. 억울하게 죽은 저싱 사름을 위해.
**** 물애기: 물애기리고 부르면 나도 물렁거리는 진흙 덩어리가 되네.
※ 블로그 註: "봇디창옷(제주어 연구소 제공)" 사진(p. 19)은 책에서 일독 要
해설> 한 문장: 시인은 제주도의 비극적인 역사를 고발함과 더불어 제주어의 발견을 통해 제주도의 원형과 서사를 조명한다. 다수의 제주어들이 등장하는 뒤의 시에서 "나이 든 어머니"는 제주어를 쓰면 "눈과 입에서 웃음이 먼저 번지"고, "세상의 모든 국경이 삶은 국수처럼 무너"진다. 시인은 이러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점점 사라지는 제주어를 적어보는 봄밤"에 "80년 된 콥데사니 같은 알싸한 제주어"가 뾰족하니 돋는다고 쓴다. 이 시가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안온하고 행복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 제주어에 대대로 내려온 제주도 고유의 원형과 유전자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제목으로 삼은 '봇디창옷'은 이 원형과 유전의 한 상징이다. (p. 시 17, 각주 19/ 론 130-131) (이홍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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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애월』 에서/ 2023. 11. 13. <여우난골> 펴냄
* 서안나/ 1990년『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플롯 속의 그녀들』『립스틱 발달사』『새를 심었습니다』, 평론집『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연구서『현대시의 상상력과 감각』, 편저『정의홍선집 1· 2』『전숙희 수필 선집』, 동시집 『엄마는 외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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