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 서투른 결심 외 2편
서안나
슬픔은 소주잔처럼 손잡이가 없어 캄캄하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새벽마다 물결로 흩어졌다
삶은 돼지고기 한 근에 찬술 마시고
아버지는 북극처럼 혼자 춥다
습자지처럼 뒤돌아보면 자국만 남는
슬픔은 그런 것이다
봄날 새벽
나도 아버지가 마셨던 녹색 빈 술병을 본다
술병 속에 아버지가 앉아 있다
병만 남은 사람의 몸은 고요하다
병 속에서 바람이 흘러나온다 담배 냄새가 났다
애월을 걸으면
물빛이 아버지의 눈빛과 닮았다
당신을 되돌아보지 않겠다는
서투른 결심을 한다
-전문(p. 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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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 신장 위구르
고백은
고백할수록 더 참혹하다
우리는
우리의 추악함을 견뎌야 한다
중국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위구르족을
재교육 캠프 수용소에 가두었다
백만 명 이상 사망했다
수용소에서 탈출한 여성은 밤마다 집단 강간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카자흐족 여인은 수감된 여성들의 옷을 벗기고 손을 묶어
중국인 남성에게 넘겨 돈을 받았다고 말했다
4 · 3 때 제주 전역에선 군경과 서북청년단이
양민을 집단 학살했다
마을이 불탔고 사람들이 총살당하고 불태워졌다
선민공작으로 백기를 들고
산에서 투항한 이들은 주정공장 수용소에 갇혀 총살되거나
육지의 수용소를 이감되거나
배에 태워져 수장되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전문(p.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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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 순암 서간順菴 書簡 2
삼불후三不朽
공자가 자신이 살던 노나라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춘추이며 이를 좌구명이 해석한 것이 춘추좌전이오
춘추좌전에는 죽어서도 썩지 않는 세 개의 것이 있다 하였지
덕을 세우는 입덕과 공을 세우는 입공
마지막이 입언言이라
글과 책을 남겨 그 내용이
후대에도 죽지 않고 썩지 않는다 하였지
글을 읽고 글을 써 서책을 엮는 것은
이 글이 진언처럼 물결에 밀려가고 밀려와
하늘을 찢고 땅을 열고
다시 물결로 돌아오는 이치이니
물결은 천의무봉하여
하늘과 땅과 사람을 껴안아
천지인 하나가 되는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의 이치이니
살아서 죽어
죽어서 살아 그대에게 닿는
팔만사천 자의 썩지 않는 문장이라
삼불후이니
이마에 썩지 않는 눈을 그리고
그 눈을 뜨고 문장으로 물결치시라
-전문(p. 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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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애월』 에서/ 2023. 11. 13. <여우난골> 펴냄
* 서안나/ 1990년『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플롯 속의 그녀들』『립스틱 발달사』『새를 심었습니다』, 평론집『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연구서『현대시의 상상력과 감각』, 편저『정의홍선집 1· 2』『전숙희 수필 선집』, 동시집 『엄마는 외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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