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연기법(緣起法) 외 1편/ 정복선

검지 정숙자 2024. 1. 4. 01:45

 

    연기법緣起法 외 1편

 

     정복선

 

 

  세상이 나를 찍고 베어 내고 켜고 다듬네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로 이네 대청마루로 놓네

 

  세상이 나를 빻고 빻아 명사산鳴砂山의 모래로 날리네

  흩날리며 우네 사막 너머 투르판의 포도나무를 키우네

  푸른 열매, 건포도가 되네

 

  세상이 나를 덖고 볶고 찌고 말리고 삶아서

  나물도 만들고 차도 만들고 약도 만드네

 

  손가락에 남은 지문 희미하네

  내 어머니도 그러하였고 내 딸 또한 그러하겠네

 

  우울한 날에는 혼자서 구름을 덮고 눕다가

  문득, 말을 타고 달려 나가네

     -전문(p.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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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퍼 벨트*에서 헤매는

 

 

  그렇게 잊지 않고 싶었던가

  이생에서 딱 한번 찔린 상처가 낫질 않아

  영원처럼 떠도는 곳마다 눈꽃 흩날리는,

  지금 어디만큼 맴돌고 있는지 알고 싶어도

  눈물이 운석隕石이 되어 가도

  깨진 조각의,

  혼자만의 닫힌 별,

  어디를 돌든 그저 허적한 명왕성의 변두리일 뿐

  우우, 사랑! 이었다고 믿었던 포영泡影

  되돌아가고 싶은 첫 궤도가 어디냐

      -전문(p. 56)

 

   * Kuiper Belt : 해왕성 너머 수백만 개의 얼음 천체와 왜소 행성이 있는 지역. 명왕성이 이곳에 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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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변주, 청평의 저쪽』에서/ 2023. 12. 20. <문예바다> 펴냄

  * 정복선/ 전북 전주 출생, 1988년『시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종이비행기가 내게 날아든다면』『마음여행』『여유당 시편』등 8권, 시선집『젊음이 이름을 적고 갔네』, 영한시선집『Sand Relief』, 평론집『호모 노마드의 시적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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