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암흑 물질 외 1편/ 김신용

검지 정숙자 2024. 1. 11. 02:32

 

    암흑 물질 외 1편

 

     김신용

 

 

  어깨에 헌 포대를 걸친 사내가 걸어온다. 그는 쓰레기통 근처를 서성이며 빈 병이며 갖가지 고물들을 주워 헌 포대에 담는다. 아직 공사판 같은 데서 잡일이라도 할 수 있는 나이 같은데도 어디 병색이 있는지 야위고 지친 낯빛으로, 그 빈 병 따위가 담긴 헌 포대를 어깨에 걸치고 발밑만 내려다보며 걷는다. 누가 쳐다보건 말건 그 표정 그 시선으로 걷는다. 가만가만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이곳에 없는 듯 자신은 모든 것의 바깥에 있는 듯 걷는다. 미명인 이른 새벽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사내, 그가 어디에서 기거하는지 딸린 식구들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말없이 그저 묵묵히 제 발끝만 내려다보며 혹시 쓰레기통 곁에 빈 병이라도 있는지, 호구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 그것만 쳐다보며 걷는다. 쳐다보는 시선들도 그의 바깥에 있는 듯 말없는 눈길을 거두곤 한다. 그러나 그는 걸어온다. 이른 새벽이면 어김없이 걸어온다.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모든 것의 바깥에 있는 듯 걸어온다. 자기 자신마저 자신의 바깥에 있다는 듯 걸어온다. 그 침묵이, 힘없는 발걸음이, 등에 축 늘어져 있는 헌 포대가 제 자신을 지워도, 그는 그저 묵묵히 모든 것의 바깥에서 걸어와 모든 것의 바깥으로 지워진다.

    -전문(p. 1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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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

 

 

  낡은 판자벽의 못이 구멍 속에서 곧 빠져나올 듯 헐렁이고 있다 

 

  못의 구멍 속에도 초대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늙은 시간들이 있었는지, 그렇게 시간의 풍화작용에 닳아가며 생의, 거품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는지 못은, 이 구멍이 내가 몸담았던 곳이 맞을까? 의아해하듯 빠져나오려다가 도로 들어가곤 한다

 

  뿌리 깊은 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암반도 휘감으며 땅속 깊이 박힌 뿌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흔들리다니! 덜컹이다니!

 

  바람이 불 때마다 곧 튀어나올 듯 덜컹이는 것이 무슨 감옥의 문이 열린 듯, 그 무기無期의 시간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은 듯도 하지만 못은, 도무지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 표정이다. 오랜 세월, 헐거워진 구멍 속에서 뼈 마디마디 닳아 가고 있으면서도 빠져나오지 않으려고 온몸으로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

 

  그래, 살아온 날들이 눈에 가시처럼 돋아 있어도, 그 시간이 가슴에 돌의 알을 낳아도 내가 빠지면 벌어진 틈새로 바람이 스며들어 아이들의 손발이 차가울 것인데, 웅크린 생활의 무릎이 더 시려올 것인데

 

  못은, 그런 걱정으로 구멍 속을 기어코 버티고 있는 것 같다

 

  바람이 불 때마다 너무 오래 덜컹거려 헐거워진 구멍 속으로 빗물이라도 스며들면 녹슨 관절이 더 삐걱거릴 것인데, 그렇게 녹슬어 가는 몸의 구석구석 암갈색의 녹은 마치 암세포처럼 더 빠르게 퍼져 흐를 것인데, 

 

  그래도 못은 헐거워진 구멍 속을 한사코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

 

  그 아픈 시간들이 지금은 눈의 비문飛蚊처럼 돋아 있어도, 못의 구멍 속에도 꽃이 피고 구름이 흐르고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 못은, 바람에 덜컹일 때마다 빠져나오지 않으려고 혼신으로, 구멍 속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다

 

  그 생이, 마치 쥐라기의 늙은 황혼처럼 구부정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어도······

    -전문(p. 9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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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진흙쿠키를 굽는 시간』에서/ 2023. 12. 27. <백조> 펴냄

 * 김신용/ 1945년 부산 출생, 1988년 무크지『현대시시상』1집에 『양동시편-뼉다귀집』외 6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버려진 사람들』『개 같은 날들의 기록』『환상통』『도장골 시편』, 장편소설『달은 어디에 있나』『기계 앵무새』『새를 아세요』, 산문집『저기 둥글고 납작한 시선이 떨어져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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