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박카스 병에 대한 명상
고영민
누가 떨어뜨렸는지
빈 박카스 병 하나 연신 버스 바닥을
굴러다닌다
왼쪽으로 커브를 틀면 도르르르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커브를 틀면 도르르르 왼쪽으로,
브레이크를 밟으면 도르르르
앞으로 급히 불려간다
좌석 없는 유일한 승객처럼
손잡이를 놓친 승객처럼
이리저리 속도에 끌려다니다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진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승객들은 귤을 까먹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등받이를 적당히 눕힌 채 자고 있다
버스가 천천히 커브를 틀자
뭘 움켜쥘 수 없는 박카스 병이 이번에는
왼쪽을 놓치고 오른쪽으로
도르르르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문학청춘』2015-여름호 <문학청춘의 시와 시인>에서
* 고영민/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2002년『문학사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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