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3169

흰 발자국/ 이관묵

흰 발자국      이관묵    눈 쌓인 숲길을 걸었네  한 마리 새 발자국을 따라 걸었네  벌판 둘러메고 한없이 혼자 걸어간   흰 발자국   이별의 간격이었네  그 속도였네  한 곳에 이르러 한참을 머뭇거리다 사라진  되돌아 나간 흔적 없는   하얀 영혼   어디쯤일까  나를 오래 세워놓은 여기는      -전문-   해설> 한 문장: 지금 이곳은 여름, 열기의 감옥. 열파 속에서 읽는 겨울의 시. 눈雪이 점령한 백색 공간에서 여름의 백백白白한 햇빛 아래로 건너온다. 상상의 선을 타고 움직인다. 바다가 '나'의 몸에 상감象嵌한 흰 발자국. 그 물빛과 하늘빛 사이에 낀 구름. 몰려오는 바람과 파도의 발톱을 바라보면서 떠올린 것은 절망. '나'를 맑게 하는 눈물을 본 듯하다. 이별만큼 쉬운 것이 없다. ..

도마의 전설 외 1편/ 황정산

도마의 전설 외 1편     황정산    단풍나무로 만든 도마가 있었다  백정 무태의 도마였다  크기와 무게와 그 견고함으로  단연 도마의 왕이었다  수많은 칼질에 피와 살이 파고들어  이것으로 모진 학대를 견딜 수 있었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도마는 성벽 위에 올려져   잠시 방패가 되었다  조총 탄환이 박히고 불에 그을렸지만  아직 쓸 만한 도마는 다시 칼을 받았다   오랜 세월 후  갈라지고 부스러져 옹이 부분만 남은 도마는  고임목이 되어 창고 문틀을 받치고 있었다  한 떼의 동학군이 관아를 습격하다  석화되어 단단해진 이 목재를 발견하고  공들여 깎고 기름에 튀겨 화승대 총알을 만들었다  도마가 이제 피와 살을 파고들었다   도마는 없다  박물관에도 역사책에도  도마는 보이지 않는다  도마들은 남..

블랙맘바/ 황정산

블랙맘바      황정산    돈다발 사이에서 너를 만났다  악당 빌을 죽이는 영화에서였다  뱀을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권법보다 칼보다 더 민첩하고 예리하게  눈먼 것들을 죽이고 있었다   주)  블랙맘바는 아프리카에 사는 독사이다  맹독을 가진 이 뱀은 아주 빠르기도 해서  치타를 뒤쫓아가 물어 죽인다고 한다  아프리카 사지의 개체수가 줄어든 것도 이 뱀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학계에 보고된 사실은 아직 없다   코끼리를 물어 죽이고 먹지 않는  정의를 위해서 눈을 어둡게 칠한  검은 입속에 희생자의 공포를 감춘  우리는 모두  잽싸거나 치명적이거나     -전문-   해설> 한 문장: "블랙맘바"는 알다시피 맹독을 지닌 눈과 입만 검은색을 띤 코브라과 뱀으로 잽싸고 사납기로 유명하다. 영화 『킬빌』..

어머니, 그 호칭 외 1편/ 김상현

어머니, 그 호칭 외 1편      김상현    어머니 돌아가시고  어머니란 말에 슬픔이 머문 것은   어머니라 부를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   더 한 슬픔은 이제 아무도  부를 이름이 없다는 것   육십 넘은 응석받이가 실없이 부르던 그 호칭,  신열이 날 때 절로 나오던 그 호칭   어머니 돌아가시고  어머니란 말을 잃는 건   불러야 할 온 세상의 이름을 잃는 것.     -전문(p. 64)       --------------------------------------------------    인체에 관한 기계공학적 접근   가능한 싱싱하고 말랑말랑한 것들을 연료로 쓴다. 입구에 있는 1차 파쇄기를 지나면 아래로 곧게 난 직선의 튜브를 통과해 2차 정밀분쇄기로 들어간다. 연료가 들어오면 ..

무욕(無慾)_강물사색 1/ 김상현

무욕無慾        강물사색 1      김상현    강물에 비친  꽃  내 것 아니고   강물에 넘어진  산  내 것 아니고   오직  내 것은  살 비비며 같이 흘러가는  그대뿐.    -전문-   해설> 한 문장: 존재는 시간과 공간적으로 그 실존이 전개되며 생성된다. 이때 "존재의 요인은 흘러가 버리는 것이며 열린 사건"(미하일 바흐친 1895-1975, 80세, 러시아 사상가)이다. '나'가 강물에 잠길 때 '나'와 '강물'은 둘 다 변한다. '나'는 강물에 잠긴 '나'가 되고, 강물 역시 '나'가 잠긴 강물이 된다. 이 사건의 흐름에서 '나'가 강물에 잠기기 직전에 '나'와 '강물'의 변하지 않는 측면과 또 강물에 잠기는 순간에 변하는 측면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 상태로 주어진다. 이러한 여건..

그대가 있기에 외 7편/ 김찬옥

그대가 있기에 외 7편     김찬옥   당당한 그대의 벽에  크레파스로 희로애락을 그렸기에  나는 뒤늦게나마 시인이 될 수 있었고  때로는 수렁에도 시를 모종할 수 있었고  제 인생의 반은 푸르를 수 있었습니다     -전문(p. 사진 22/ 시 23)      ---------    삼 대   벽과 벽이 달리는 파도에 올라탔다  숨어있는 경계가 파도보다 많이 부서졌다  발밑에서 물살이 휘어질 때  암벽 같은 딱딱한 부성도 부드러워졌다     -전문(p. 사진642/ 시 65)        -------------------    그래서, 꽃   사람은 이웃에 비수를 꽂아도    꽃은 그 비수를 딛고 넘어와   따뜻하고 향기로운 손 내민다     -전문(p. 사진 66/ 시 67)      ------..

적벽강/ 김찬옥

적벽강     김찬옥    고향 집에 혼자 남은  어머니의 눈은 늘 수평선에 걸려있었다   거친 파도에 깎여 뼈만 앙상하게 남은 적벽처럼  켜켜이 살집을 내어 준 자리에 갖가지 무늬를 새기고  오늘도 굽이쳐 오는 물살을 낸발로 마중 나오셨다      -전문-   시인의 산문> 中: 자연은 내가 길을 잃고 헤매일 때 등불이 되어 주었다. 폐경기에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다. 평상시에 좋아하던 일들도 하나같이 다 재미가 없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반문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스스로 처방을 내릴 수 있었다. 병원 가는 일을 접고 산책 속에 빠져 점자 같은 나를 읽어내기로 했다. 산행하다 보니 죽어있는 나를 깨울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무와 꽃들과 작은 풀꽃들까지도 다시 태어난 나를 ..

어머니의 가르마/ 김찬옥

어머니의 가르마      김찬옥    쪽진 어머니 머리에 난  반듯한 길이 있어  오 형제가 굶주림은 면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가르마를 뽑아 전봇대 세울 때쯤  보릿고개도 먼 신화가 되었다    -전문-   시인의 산문> 中: 슬픔밖에 모르던 내가 어떻게 시인이 되었을까. 스스로도 궁금해질 때가 있다. 슬픔은 소리소문없이 혼자 왔다 가는 것이 아니다. 머물렀다 간 그 자리에 나만이 풀 수 있는 암호를 남기고 갔다. 그 암호를 푸는 일이 글쓰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물 자체인 어머니와 삼라만상을 품어주는 대자연을 몰랐더라면, 나는 글 쓰는 일을 시도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여름 울 안에 살구나무라도 한 그루 있었더라면 어린 시절이 그리 팍팍하지는 않았을 걸,  아버지의 술을 피해 어린 내 영혼은 늘..

태초에 흠 없는 사과가 있었다 외 1편/ 지관순

태초에 흠 없는 사과가 있었다 외 1편      지관순    한계를 모를 땐 누구나 향기롭지   한번 움켜쥐면 내려놓기 힘든 붉고 아삭한  둥긂이어서  너는   손아귀에 스며들기 좋아하지  다른 속도로 깊어가는 속살에게 애원하기 좋아하지   살금살금  우글거리는 고충을 피해 다니다가  손금 밟히기도 하지   어디서부터 사과입니까  꼭지를 붙들고 꼬치꼬치 캐물으면   하나둘 모여드는  느린 사과 덧칠한 엎질러진 사과 우유부단한 사과  중얼중얼 범람하는 사과   어떻게 실현됩니까 사과는   누군가 중심을 쪼개려고 와락 달려들지  나는 단단히 쥐고 있지  사과에 사활을 건 사과 사흘 안에 부활을 꿈꾸는 사과   둥긂과 와락 사이에 사과나무가 서 있었지      -전문(p. 60-61)      --------..

파도바니 해변에서/ 지관순

파도바니 해변에서      지관순    이윽고 조명이 어두워지고 홀 중앙에 그녀가 쏟아졌네. 공중에 뿌린 색종이처럼 그녀가 조각조각 내려앉았네. 몸과 숨과 시간을 차례로 이어가며. 우리는 그녀의 춤에 빠져들었네. 실내가 그녀의 궤적으로 가득 차올랐네. 없음과 있음을 골고루 비추면서. 향기로운 응시가 주변을 물들였네. 번져갔네. 그녀가 팔을 뻗어 공중의 현을 끊었네. 잘려 나간 현이 음악을 뱉었네. 그녀의 몸에서 시간이 번뜩였네. 모든 가락이 술렁거렸네. 망각의 질료들이 끌려 나왔네. 그녀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네. 뒤섞이는 기억들. 회귀하는 호흡들. 홀 중앙에 그녀가 벗어놓은 춤이 남았네. 우리는 다시 춤에 빠져들었네. 그림자가 아니었냐고. 몸이 없는 춤이 왜 끝나지 않느냐고. 심문하듯이. 불은 꺼지고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