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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편지/ 정숙자

시와 편지 정숙자 편지는 은허문자 이래로 가장 순수한 글이다. 대중에게 읽힐 것도 아니요, 오로지 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에게 마음을 선사하는 일이다. 자판만 두들기면 상대방 컴퓨터 모니터에 휘뜩 들어가 박히는 e-메일과는 다르다. 나만이 선택한 종이가 다르고, 나만이 굳혀온 필적이 다르고, 나만의 기호인 잉크 색이 다르다. 뿐일까, 편지에는 유일무이의 지문이 담긴다. 누군가 한 통의 편지를 받아든 순간 두 사람의 손이 포개어진다. 시내버스 요금에도 못 미치는 우표 한 장이 정갈한 육필과 함께 어느 우편함에 꽂히었다면 그것은 촉수를 잴 수 없는 빛이 이 세상 한 귀퉁이를 따뜻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늘 높이 슬픈 노래가 저 철교 위를 흐른다. 하늘 높이 슬픈 노래가 저 철교 위를 흐른다. 기차가 ..

시와 고요/ 정숙자

시와 고요 정숙자 1 고요는 풍력 0급에 해당하는 바람이다. 초속 0.0~0.2m. 그러므로 연기가 곧장 위로 올라간다. 귀를 기울여도 들리는 바 없고, 흔들어도 나부낌이 없으며 만지려 해도 형체가 없다. 그 무색투명한 고요는 그러나 분명하고도 견고하게 우리 곁에 존재한다. 고요는 하늘 아래 첫 번째로 아늑한 기슭이요, 집이다. 오늘도 나는 그 곳을 그리워한다. 삶의 피로가 엄습할 때마다 돌려놓고 싶은 시간은 과거의 어느 장소가 아니라 고요다. 그 고샅에서는 지혜조차 진부하다. 맑고 따뜻한 영혼만이 거주할 수 있는 그 곳의 시민권을 나는 어디서 박탈당한 것일까. 송하문동자(松下問童子)하니 언사채약거(言師採藥去)라 지재차산중(只在此山中)이나 운심부지처(雲深不知處)라 소나무 아래 동자에게 물으니 스승님은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