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고요
정숙자
1
고요는 풍력 0급에 해당하는 바람이다. 초속 0.0~0.2m. 그러므로 연기가 곧장 위로 올라간다. 귀를 기울여도 들리는 바 없고, 흔들어도 나부낌이 없으며 만지려 해도 형체가 없다. 그 무색투명한 고요는 그러나 분명하고도 견고하게 우리 곁에 존재한다. 고요는 하늘 아래 첫 번째로 아늑한 기슭이요, 집이다. 오늘도 나는 그 곳을 그리워한다. 삶의 피로가 엄습할 때마다 돌려놓고 싶은 시간은 과거의 어느 장소가 아니라 고요다. 그 고샅에서는 지혜조차 진부하다. 맑고 따뜻한 영혼만이 거주할 수 있는 그 곳의 시민권을 나는 어디서 박탈당한 것일까.
송하문동자(松下問童子)하니
언사채약거(言師採藥去)라
지재차산중(只在此山中)이나
운심부지처(雲深不知處)라
소나무 아래 동자에게 물으니
스승님은 약초 캐러 가셨다하네
다만 이 산 속에 계시지만
구름이 깊어 찾을 수 없다하네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
이 시는 가도(賈島, 779~843, 字는 浪仙)의 ‘은자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라는 오언절구다. 중당(中唐) 때 시인으로 슬픔을 읊은 노래가 특히 유명했다고 한다. 언어가 세련되고 묘사가 치밀하여 아무리 재미없는 제재나 심정이라 할지라도 그 문장이 빼어났다고 전해진다. 하북성 범양(范陽, 지금의 북경 부근) 출생으로 처음엔 불가에 들어 무본(無本)이라는 법명을 썼으나 한유(韓愈)의 권고에 따라 환속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하고 하급관리로 전전하다가 병몰하였으니 ‘떠돌이 신선(浪仙)’ 이라는 이름이 운명을 그린 듯하다. 그리고 그에게서 비롯된 <퇴고(推敲)>의 일화는 널리 알려졌지만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는 대목이다. 즉, 그가 “새는 연못가의 나무에 잠들고/스님은 달 아래 대문을 두드린다(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라는 구절을 놓고 밀 퇴(推)자를 쓸 것인가 두드릴고(敲)자를 쓸 것인가 고심하던 차에 한유를 만나, 두드릴고(敲)가 좋다는 교시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2
이 시는 에누리를 후하게 접고도 천 년을 넘어온 생명이다. 현대시에서도 쉽지 않은 객관화의 전형을 무리 없이 보여주고 있는 가작이다. 사적인 감정에서 출발하는 운문이 서정시인 만큼 웬만한 솜씨가 아니고서는 ‘나’를 숨기기가 쉽지 않다. 오랜 세월 먹을 갈아온 시인의 필세일지라도 어디선가 ‘내’가 튀어나오기 일쑤다. 그런데 가도의 이 시에서는 어디서도 ‘나’가 나타나지 않는다. 안 계신다는 표현으로써 자신의 이상인 스승을 감추었지만, 그 스승의 정신적 경지를 어찌 이보다 더 잘 드러낼 수 있겠는가. 일체의 번다가 끊어져 담담만이 여여로운 상태다. 철학이면서도 지침이 드러나지 않고, 잠언이면서도 경구가 물러난 범아일여(梵我一如)가 은은히 고요를 내포하고 있을 뿐이다. 이 시에서는 나그네와 동자까지도 수선스럽지 않다. 스승의 고요를 헤살 놓지 않는다. 그 경계가 바로 가도 자신의 유토피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백미는 고립된 고요를 그린 게 아니라는 데 있다. 나그네를 빌어 세상으로 통하는 한쪽 문을 열어 두었다는 점이 이 시를 오래도록 살아 숨쉬게 하는지도 모른다. 고요라는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이렇듯 완벽에 가까운 고요를 그려낸 가도는 글의 구조와 성리(性理)를 얼마나 깊이 성찰한 시인이었을까.
3
마음을 다친 날이면 나는 간혹 베란다 문을 열고 후박나무 잎새를 어루만진다. 아파트가 낡을 동안 자라 오른 후박나무가 3층에 자리한 내 집 창틀에 팔 하나를 드리우고 있는 까닭이다. 빗방울이 날릴 때면 잎새 위의 영롱한 은구슬들이 뒤뚱거리는 위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유독 태깔이라곤 없는, 그저 둥글넙적하기만 한 잎사귀의 후박나무는 말 그대로 후박(厚朴)나무다. 바람이 불어도 소란스럽지 않은 그와의 교감을 나는 좋아한다. 달콤한 말은 변질되기 쉽고 변질된 언어는 공기를 부패시킨다. 잠시도 멈추지 않는 천체의 운행은 여미고 여민 심연을 종횡무진 분탕질 친다. 그 어둠 속 침묵이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할 때 후박나무는 묵묵히 고요를 나누어준다.
이 세상을 다녀간 사람 중에 가장 고요로운 이름을 짚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붓다를 떠올릴 것이다. 환한 이마, 낮은 눈, 굳건한 무릎, 완만한 어깨…. 그가 두고 간 고요는 사라질 수 없는 산소이며 방향이다. 억담(臆談)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붓다가 되고 싶은 소망도 아주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순간순간 고요를 만났던 기억이 있을 테니 말이다. 다만 진정한 붓다는 고요의 상태가 지속된다는 뜻이고, 범인은 고요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다는 데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만일 자기 안에서 단 한 번도 붓다를 만난 적이 없다면 그의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고, 그를 선망하거나 숭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요를 염원하는 사람은 이미 붓다였고, 붓다이며, 붓다이리라. 단지 마음 속 고요가 장시간 외출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또 기울이면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구름 깊은 산과 약초 캐러 가신 가도의 스승님도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4
고요는 모든 사유와 감정의 어머니다. 고요로부터 나온 모든 사유와 감정은 고요로 돌아간다. 길 떠난 사유와 감정이 고요를 잊어버릴지라도 고요는 그들을 염려하고 그리워하며 언제까지나 기다린다. 고요는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지라도 외로워하지 않는다. 고요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사유와 감정들을 위해 밤이나 낮이나 사립문을 잠그지 않는다. 고요는 사계절 내내 상처 입은 기쁨, 어긋난 즐거움, 미숙한 화해가 돌아와 갈아입을 여명을 짠다. 고요는 모든 사유와 감정을 탓하지 않으며 왜곡하지 않으며 버리지 않는다. 폭풍을 수반한 죄․악일지라도 그들의 본성이 맑고 따뜻하다는 것을 고요는 안다. 모든 사유와 감정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출렁거린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돌아오고 있는 발자국 소리임을 고요는 안다.
5
시인으로서의 내 삶은 출발 이전부터도 매우 팍팍한 것이었다. 독학에 의존했던 나의 문학은 스승도, 선후배도, 동료도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결혼 이후 군인가족 생활은 오지에서 오지로 이어졌다. 문단의 조수(潮水)는 고사하고 샛강조차 알지 못하는 처지에서 등단은 진암절벽이었다. 서랍 속 원고들은 싹 틔울 길 없는 씨앗이었다. 그 막막한 시업(詩業)을 위해 나는 무턱대고 고행을 시작하였다. 매일매일의 냉수욕을 축으로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촛불을 켰고, 정오까지의 불식을 지켰으며, 심약(心弱)을 물리치고자 도깨비불 뒹구는 시골길을 밤마다 혼자서 걷기도 했다. 되도록 눈높이 아래로 시선을 두고, 묵언기(黙言期)를 갖는 등의 일상도 병행하였다. 그리고 또 섣달그믐밤이면 자정을 기다려 찬물에 목욕재계하고 북극성을 바라보곤 했는데 방에 들어와 머리를 빗을라치면 얼어붙은 머리털 사이로 빗이 들어가지 않았었다. 고독과 고뇌를 고요로 바꾸기 위한 염원이 그렇게 꼬박 5년을 메웠다. 그 다섯 해 동안 겨울이면 온몸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수시로 관격에 시달리며 접신의 고통도 겪어야 했다. 시와 고독과 고요와 나는 헤어지려야 헤어질 수조차 없는 상생(相生)의 운명이었다.
6
우리 내면에는 육체를 이룬 관절만큼이나 많은 톱니바퀴가 돌고 있다. 그 많은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희로애락을 관장한다. 톱니바퀴들이 완급의 조화를 유지하며 욕심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고요를 감지한다. 몇몇 톱니바퀴가 문제를 일으킬 경우 슬픔․우울․근심을 접하게 되고, 모든 톱니바퀴가 일제히 빛을 발하며 빠른 속도로 가동되는 순간 기쁨․환희․황홀을 체험하는 것이리라. 한편 우리는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톱니바퀴이기도 하고, 이 세상과 우주를 연결하는 미분자의 톱니바퀴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톱니바퀴도 유연하게 다루어내지 못한다. 간혹 타인에게 공손한 톱니바퀴가 되지 못함은 물론이요, 마치 원격제어를 당하는 것처럼 자기 안의 톱니바퀴조차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허다하다. 묘수가 체득되지 않는 삶은 시간이 쌓일수록 알 수 없는 것이 되어간다. 누구에게도 시운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굴곡 앞에서 섬세한 톱니바퀴일수록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어느 때는 그 많은 톱니바퀴들이 단 하나도 이빨을 맞추지 못한 채 굉음을 내며 튕겨나간다. 의성어나 의태어로 담아내지 못할 소리들이 머리를 채우고 조여 촌음도 흘러가지 않는다. 무정부 상태가 되어버린 톱니바퀴들은 이성을 짓이기고 뼈를 바수며 쉴 새 없이 허공에 피를 뿌린다. 그러한 시간을 우리는 고통이라고 부른다. 이때 우리는 생각도 행위도 가지런할 수 없다. 자살 따위를 구상해 보지만 그것도 질서를 잡지 못한다. 톱니바퀴 사이사이에 낀 살점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관절이 회복되어 향기로운 햇살을 머금기까지는 강도 높은 인내를 붙들어야 한다.
7
고요만큼 다양한 개념을 가진 관념어도 없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적막으로, 어떤 이에게는 환희로, 또 어떤 이에게는 경지로도 보일 것이다. ‘고요’라는 단어가 삼백육십 인에게 삼백육십 색으로 비쳐질 것이지만, 시인은 자기의 일각을 통해서 나머지 삼백오십아홉 색깔을 감촉해야 한다. 외부와의 대립, 자아의 모순, 자연과의 별리 등을 삭이고 다독거려 우담발화를 잉태해야 한다. 풀잎이 돋아나듯 다시 돌기 시작한 톱니바퀴들을 몇 번이고 백지 위에 쏟아 붓는 시인들. 그들에게는 성찬도, 성장도, 고루거각도 부러움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결국 시인들은 시라는 자석에만 머리와 척추를 깡그리 들이미는 쇠못들이다. 가도의 ‘심은자불우’에 비추어보면 이 세상이 바로 산이요, 시인들은 은자이며 그의 인척들은 나그네다. 시인은 한 이불을 덮는 반려에게도 온전한 아내나 남편일 수 없고, 한 솥 밥 먹는 부모자식에게조차 온전한 혈육일 수 없다. 죽마고우일지라도 온전한 벗, 온전한 이웃일 수 없다. 마음 한복판을 늘 시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인연을 축낸 시편들이 과연 이 세상에 무엇인가에 대해 명쾌한 답을 들려줄 수 없다는 게 현대의 불행이라고 하면 틀린 말일까.
8
고요는 바로 곁에 있으면서도 쉽사리 드나들 수 없는 영역이다. 고요에 들기 위해서는 괴로움보다도 먼저 기쁨을 끊어야 하고, 기쁨을 끊으려면 잡다한 분별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누군들 고요에 몸담고 싶지 않으랴. 모자람도 넘침도 없는 고요, 잃어버린 고요를 그리워하며 잠시 펜을 놓고 후박나무를 바라다본다. 햇살이 통과하는 잎새들은 투명한 연둣빛으로, 그늘진 잎새들은 녹색으로 어울려 바람결을 되작거린다. 참새 한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어라 참견하고 날아간다. 세상의 모든 말을 다 알아들어야만 좋은 것은 아니다. 바람의 말을, 구름의 말을, 방금 날아간 저 참새의 말을 모르는 그대로 우리는 행복하다. 일체가 고요한 상태에서는 붓다와 중생이 따로 있을 수 없고 은자와 나그네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붓다가 가도이며, 구름 깊은 골짜기와 저잣거리와의 솔기도 없다. 나는 세월을 가로질러 동자와 함께 은자를 만난다. 은자의 바구니에는 모나지 않은 물소리와 무욕이 가득하다. 푸르디 푸른 태양이 시공의 중심을 지나고 있다.
*『애지』2003-가을호
'제1산문집 · 밝은음자리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와 사랑/ 정숙자 (0) | 2010.11.15 |
---|---|
시와 편지/ 정숙자 (0) | 2010.11.13 |
시와 생명/ 정숙자 (0) | 2010.11.07 |
시와 어머니/ 정숙자 (0) | 2010.11.07 |
시와 시간/ 정숙자 (0) | 2010.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