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르넬로
정숙자
사람 나이 열 살이란 사물에 대해 얼마만큼의 이해와 판단력을 지닌 생장점일까. 열 살의 봄빛은 얼마만큼의 푸른 깃털과 열매들을 숨긴 밑둥치일까. 열 살의 인내와 열 살의 아픔은 얼마만큼 오랫동안 기억되며 언제까지 근간을 돕는 엽록소일까. 열 살짜리에게 삶이란 무엇이며 생활이란 어떤 것이며 인생이란 또 어떤 어울림일까. 열 살 이상의 모든 실존은 열 살 적 기억을 더듬을 수 있으리라.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열 살 때의 일화는 각기 다른 퍼즐로 내재되어 있으리라. 열 살짜리의 나날은 부모님 슬하에서 무늬가 짜여진다. 아직 백지 상태의 아이에게는 부모의 생활상 그대로가 세계화로 정립된다.
내 열 살의 초가는 매우 화목하고 근면/성실하며 춘하추동 정직했다. 먼 훗날 염라대왕이 ‘가장 죄 없는 곳이 어디였던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어린시절의 초가’였다고 대답하련다. 모퉁이엔 토끼장이, 헛간 옆엔 돼지막이, 굴뚝 뒤쪽으로는 닭장이, 마루 밑에선 유순한 ‘메리’가 새끼를 낳기도 했던 곳. 맑고 따뜻했던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 우물물 소리 청랑한 그 하늘에 금전만 넉넉했다면 거기가 바로 최상의 파라다이스요 복락원이 아니었을까.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빈가의 아이들은 철부지를 거치지 않고 곧장 어른이 된다. 열 살이면 벌써 상황을 가늠하고 인내하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제할 줄 안다.
그러잖아도 어리보기인 나를 작은오빠는 출생일자까지 위조하여 딱 일곱 살에 입학시켰다. 초등학교 4학년, 그러니까 열 살이지만 정확하게는 아홉 살이었던 그해 봄. 전북 김제군 백구면 월봉리에 자리한 우리 부용국민학교에서도 어린이날을 맞아 합창대회에 나갈 준비를 했다. 나도 상급반이 되었으므로 합창단원 뽑는 날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 늘 편찮으신데도 일하셨던 아버지, 호미자루 놓지 못하는 어머니 모습 때문이었을까. 그 무렵 나는 대체로 우울했고 뛰어놀기보다는 공상을 뒤적거리는 명랑부족 꼬마였다.
음악담당 선생님의 오디션이 시작된 오후. 우리는 번호순으로 한 사람 한 사람 교단에 나가 선생님의 풍금 소리에 맞춰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를 부르게 되었다. 4 ‧ 5 ‧ 6학년 전체에서 뽑기로 돼 있었고, 우승이 목표였으니 꽤 야심 찬 선정과정이었다. 다들 긴장했지만 어느 누구도 차례를 건너 뛸 수 없는 일. 얼뜬 나도 교단에 서서 곧이곧대로 목청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풍금소리가 멎었다. 나도 노래를 멈췄다.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왜 첫 소절을 두 번 부르지?”, “도돌이표가 있어서예요.”, “들어가 앉아!”
교실은 단박에 숙연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선생님이나 내 앞의 어느 아이도 도돌이표를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기실 여태 가르치고 배워온 도돌이표의 이론과 실제가 맞부딪힌 찰나요 현장이었다. 똘똘하지도 않았으며 언제 어떤 기회에 두각을 드러내 보인 적도 없는 내가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로 직진하지 않고, 2절의 첫 구절 “맑고 맑은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로 유턴했으니 “들어가 앉아!”라는 말씀 외에 무슨 대응책이 솟아날 수 있었겠는가. 원리원칙에 충실했던 나는 결국 예심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그날, 방과 후 신발장에 놓인 검정고무신을 꺼내는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열 살의 심정에도 복도에 서서 바라보는 빗줄기는 참 쓸쓸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꾸중도 칭찬도 아니 하셨고, 우리에게 누구의 잘잘못도 헤아려주시지 않았다. 물론 내 뒤의 아이들 모두 도돌이표를 살리지 않았지만 그 점에 대해서도 가타부타 설명해주시지 않았다. 다만 내가 누락된 게 ‘도돌이표’ 탓은 아닐까 궁금할 따름이었다. 감히 합창단이 되리라는 기대를 품은 바 없었지만 부서지며 날아드는 빗방울가루가 왠지 선득선득 마음 가득 서글펐다.
그런데 이튿날. 담임선생님께서 합창단 명단을 다시 발표했다. 어제 없던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웬일이었을까? 어쨌든 연습이 시작되었다. 나는 알토 파트로 나뉘어 노을이 비치도록 선생님 지휘 아래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 쓸쓸한 가을날이나~ 눈보라 치는 날에도~ 소나무야~ 소나무야~ 변하지 않는 네 빛~” 돌림노래로 불렀던 「소나무」와 “오월은 푸 ․ 르 ․ 구 ․ 나~아~ 우리들은 자 ․ 라 ․ 안~다~”를 해가 기울도록 연습한 날이면 교장선생님께서는 사탕도 한 개씩 주시곤 했다.
대회 날짜가 가까워지자 <흰 블라우스와 검정 주름 점퍼스커트, 앞쪽에 하얀 선 두 줄이 짧게 들어간 운동화>가 유니폼으로 결정되었다. 블라우스와 멜빵 달린 주름치마는 갓 시집온 새언니가 자신의 옷을 뜯어 정성껏 만들어줬다. 우리 집엔 그 당시 흔치 않았던 재봉틀이 있었으므로, 새언니의 마음씨와 솜씨가 한데 어울렸으므로 나는 정말 예쁜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하지만 운동화가 문제였다. ‘돈이 없다’는 어머니의 한마디에 나는 두 번 다시 ‘운동화’를 입에 담지 않았다. 열 살짜리의 최선의 내공이었다.
콩쿠르 전날, 나보다 키가 좀 작은 ‘길미자’가 뜻밖에도 “내 운동화 신어볼래?” 하는 것이었다. 여차여차 나는 미자네 집에 따라가 운동화를 빌렸다. 그리고 대망의 아침이 밝자 흰 블라우스와 검정 점퍼스커트를 입고, 빌린 운동화를 신고 총총히 집결지인 부용역을 향했다. 경연장→김제중앙국민학교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했기 때문. 그런데 으아! 엄지발가락과 뒤꿈치가 걸음을 뗄 때마다 아파오기 시작했다. 빠듯한 신발을 신었을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경험한 적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열 살짜리의 통증이여! 족적이여!
한편, 독창을 맡았던 ‘신희’는 공단으로 된 삼단분홍원피스에 역시 분홍리본으로 긴 퍼머넌트 웨이브를 장식하고 나타났다. 신희 아버님은 근동에 하나뿐인 병원-장이셨으니 보통의 우리들과는 많은 점이 달랐다. 하지만 나는 황홀히 바라봤을 뿐, 부럽다거나 여타의 감성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열 살짜리에게 비교란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아니다, 그게 아니라 신희네는 본래 우리랑은 다른 존재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비교 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 신분에 대한 의문도, 극복할 수 있음도 전혀 몰랐던 열 살의 봄봄!
아버지는 나를 토방에 앉혀놓고 보자기로 목과 어깨를 두른 다음 머리를 깎아줬었다. 숫돌에 푸르스름 문지른 칼로 뒤통수 아래쪽을 다듬었는데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그 마무리 작업이 진행될 때 ‘싸악싸악’ 밀착되는 칼날소리가 귓속에 너무나도 크게 번졌다. 그런 식의 됫박단발을 당한 날이면 나는 거울 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자신에게조차 민망하고 미안했다. 깡총하니 깎여나간 앞뒤꼭지로 합창대회에 나가야 하다니! 참으로 사기가 저하되지 않을 수 없는 두상이었다. 하지만 열 살짜리에게 무슨 방도가 있었으랴.
그 렇지만, 그렇지만 전적으로 사기가 꿇린 것만은 아니었다. 새언니가 지어준 주름치마가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흰 블라우스 위에 그 치마를 입을 양이면 가지런한 주름이 구겨질까봐 쪼그리고 앉아서는 놀지도 못했다. 열 살의 경험, 그것은 내 인생의 예고편이었을까. 발에 신발을 맞추지 못하고 신발에 발을 맞춰야 했던 열 살의 유신(有信)을 나는 여태껏 후회하지 않는다. 남의 신발이었으므로 마땅히 그래야 했다. 만일 그런 일이 또 생긴다면 빌린 신발은 무대에서만 신고 나머지 걸음일랑 맨발의 여유를 선택하리라.
끝까지 아픔을 참고 집에 돌아와 운동화를 벗었더니 엄지발톱 두 개가 무참히 멍들어 있었다. 어릴 적 아찔한 도덕이 이제 나의 남은 삶을 지배해 주었으면 한다. ‘남의 신발을’ 구길 수 없었던 그 소심이 평생토록 나를 지켜주었으면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가락을 오므려보기도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던 5월! 48년이 지난 오늘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통증이지만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 쓸쓸한 가을날이나~ 눈보라 치는 날에도~ 소나무야~ 소나무야~ 변하지 않는 네 빛~”의 환한 화음만큼은 영원히 내 가슴을 푸르게 물들일 것이다. “오월은 푸 ․ 르 ․ 구 ․ 나~아~ 우리들은 자 ․ 라 ․ 안~다~”
이번 ‘어린이날’엔 내 안의 그 열 살짜리가 골드 스팽글에 싸인, 리본장식이 어여쁜 ‘액세서라이즈(Accessorize)'의 신발 세 켤레를 세 손녀에게 선물했다. 친손외손을 합하여 손녀만 셋인데 제일 큰 아이가 내년에 열 살이 된다. 그러므로 현 시점이 내 위조된 4학년 때의 나이와 같다. 인간의 뇌는 쉽사리 시들지 않는다. 우리 손녀들의 늙어진 어느 날 내가 사준 공주신발을 행복스레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어디에서든 손녀들의 행복을 빌어줄 것이다. 열 살배기의 멍든 발톱을 보셨을 때 어머니는 얼마나 구슬펐을까. 고마운 ‘길미자’에게 오랜 감사를 전한다. 아참, 그때 그 콩쿠르에서 우린 3위 했었다.
2009.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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