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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자
빠른 게 어찌 시간뿐이리오. 어제 만개했던 벚꽃이 오늘 길에 깔린다. 몸 있는 것들의 모든 생몰이 그와 같지 않겠는가. 종 속 과 목 강 문 계-하루살이에서 십장생에 이르기까지 어떤 육신을 막론하고 그들의 전 생애는 ‘찰나’ 라는 음절로 축약된다. 그리고 그 무한 개체의 찰나들이 모여 지구의 역사를 그려나간다. 알게 모르게 먹고 먹히는 생명의 순환이 우주의 질서이자 섭리임에랴. 죽음이 눈을 감겨주기 전에는 제아무리 강자라 해도 그 요상한 흐름에서 이탈할 수 없다. 탁류와 급류, 잔물결이 혼재하는 이 행성에서 한 생애를 노 젓고 헤엄치다 돌아간다는 게 얼마나 큰 모험이며 힘에 부친 일인가.
대개의 짐승은 천적에게만 먹힌다. 그러므로 먹이사슬의 바로 윗고리만 피하면 살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거의 모든 동식물을 먹는다. 그에 준하여 <만물의 영장>이라는 기치를 올렸다면 인간은 참으로 무자비하고 몰염치한 족속이다. ‘먹는다’의 진의는 ‘잡아 먹는다’는 뜻이다. 또한 ‘파괴한다—죽인다’로도 연결된다. 배고픔을 면키 위해 약자를 뜯는 짐승에 비해 욕심을 채우려고 타자를 삼키는 종(種)은 하늘 아래 오직 인간뿐이리라.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 인간의 최종 먹잇감이 인간이라는 데 있다. 하나의 얼굴 뒤에 수많은 얼굴을 숨기고 있는 인간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야수를 식별해야 할까.
먹잇감 용도로만 활을 쏜다면 그나마 다행. 유독 인간만이 ‘즐기기 위해’서도 사냥한다.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사냥은 어떤 말로도 응징에 값하지 못한다. 인간끼리의 첨예한 경쟁과 대립은 게마인샤프트(독.Gemeinschaft:초타산적사회)를 게젤샤프트(독.Gesellchaft:타산관계로결합된사회)로 바꾸어왔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논거는 ‘죽느냐 사느냐’라는 의제와 다르지 않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무리지어 이동하는 가젤이나 사자, 누 떼 등을 상상해보라. 우리 사회가 이미 정글인 바에야 인간들 또한 대자연에 번뜩이는 생명체와 무엇이 다를까보냐. 하여 모니터링 파트너란 힘이요 위안이며 백만 원군이다.
인간사회는 무혈의 전장이다. 짐승들은 몸을 앗기지만 인간은 마음과 정신을 살해당한다. 그러므로 ‘피눈물’은 눈물의 갈래가 아니라 마음과 정신의 ‘먹힘’에서 흐르는 혈액인 것이다. 직접 살인이 아닌 경우 인간을 베는 대상은 집단이다. 집단에 소속되지 못한 인간은 머지않은 날 도태되고 만다. 누군가를 공인하고 성장시키는 곳도 사회라고 명명된 집단이요, 절벽에서 밀어버리는 손도 집단이다. 그리고 그 사회의 구성원은 다름 아닌 너 ‧ 나/ 그들 ‧ 우리들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넓게는 사회의 각 분야에 이르기까지 혼자의 힘으로는 ‘살아남기’커녕 ‘살아있기’도 힘에 부친다.
이 난관의 타개책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노력이라는 말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왕이라 할지라도 왕좌에 오르기까지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며, 그 왕권을 유지함에 있어서도 성실과 신뢰를 겸한 인재가 필수불가결의 요건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위는 권력구조뿐 아니라 인간사 전반에 속한 진실이다.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가장 먼저 의논대상이 되어주는 사람은 가족일 것이다. 그리고 점차 친구 스승 선후배 동료 연인 등으로 폭넓어질 수 있다. 이 많은 관계그래프에서 진정 ‘나’를 위해 지혜와 애정을 얹어줄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면 그는 이미 성공의 키(key)가 확보된 셈이다.
아난이 물었다. “진정한 한 사람의 벗을 만났다면 우주의 절반을 얻은 게 아닐까요?” 붓다(佛陀)가 대답했다. “아니다. 아난아, 진정한 한 사람의 벗을 만났다면 그는 이미 우주를 다 얻은 것이니라.” 그리고 또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아난아, 진정한 벗이 아닐진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얼마나 찡한 잠언인가! 인생역정에는 그만큼 진정어린 벗이 귀하다는 상징이다. 이쯤에서 박목월의 동시 한 편을 읊조리며 쉬어가자. <다람다람 다람쥐,/ 알밤 줍는 다람쥐./ 보름보름 달밤에/ 알밤 줍는 다람쥐.// 알밤인가 하고/ 솔방울도 줍고,/ 알밤인가 하고/ 조약돌도 줍고.(「다람다람 다람쥐」-전문)
나는 오늘도 언니와 함께 벚꽃 길을 산책했다. 찢어진 내 무릎 연골의 근육강화를 위해 ‘걸으라’는 전문의의 처방이 내려졌기 때문-어언 8년이나 되었다.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눈이 쌓이든 언니와 나는 매일 두 시간 가량을 걷는다. 계단이나 비탈길은 금물! 평지로만 다녀야 한다. 내가 처음 M.R.I 촬영에 들어갔던 그 무렵 언니도 같은 증세가 생겨 산책파트너가 되었던 것이다. 언니네 집은 방배동이고 내 아파트는 반포본동이니 버스로 너댓 정거장 거리. 반포천을 건너 까페골목을 끼고 걸으면 두 집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뿐일까, 우리 아파트를 싸고도는 오솔길은 사계절이 눈부신 실크로드다.
매일 되풀이되는 저녁 어스름의 산책로는 참으로 안온하다. 우리의 실크로드는 우리의 인생을 논의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나온 8년, 그 산책로의 바람을 타고 언니도 소설가로 등단해 문인이 되었으며 단편소설집 한 권/장편소설 한 권, 도합 두 권의 창작집을 출간키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나 또한 성실과 신뢰를 겸한 문학파트너, 즉 내 글을 가장 잘 이해하고 지적해줄 수 있는 ‘모니터링 파트너’를 얻었다. 나보다 8살 많은 언니의 이름은 春子다. 91년도에 등단한 막내 仁子를 합하면 네 자매 중 셋이 펜과 머리를 깎기에 이른 것이다. 둘째 언니 京子만이 순수 독자로 남아 삼인의 글들을 관조한다.
우리 아버지는 ‘子’ 字를 무던히도 좋아했었나보다. 조기두름도 아닌 딸들의 이름을 어찌 이리 ‘子’ 字 로만 엮어놨는지 원! 공자맹자 반열이라면 모를까 이 이름으로 도대체 어떻게 한국의 21세기를 폼 잡고 겨뤄볼 수 있단 말인가. 폐일언하고, 나는 모니터링 파트너 없이 글을 쓴 적도 발표해 본 적도 없다. 13세 꼬맹이 때는 경자 언니, 그 다음엔 하나뿐인 동생 인자, 그 다음엔 딸 수경, 그리고 오늘날엔 춘자 언니가 조언한다. 가까이 사는 수경은 젊은 감각의 용어나 의미가 잘못되지나 않았는지 편편이 최종점검을 맡고 있다. 경자 언니와 인자는 고향에 머무르므로 예외적인 경우에만 전화로 의논한다.
모니터링 파트너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첫째—소신이 분명해야 하고, 둘째—시기심이 없어야 하며, 셋째—성실해야 될 뿐 아니라, 넷째—신뢰와 애정이 두터워야 한다. 그러니까 모니터링 파트너는 인간적인 인격이어야만 한다. 나는 그간의 사회생활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봤다. 물론 성심성의 타인의 모니터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배신으로 돌아온 날도 없지 않았다. 배신이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감정 중 가장 고통스러운 허탈이다. 배신한 쪽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별로 아파하지 않는 게 특징이며, 자신의 보폭에 비해 욕망이 팽배한 자는 분명 은혜를 배신으로 갚고야 만다.
모 니터링 파트너란 단순한 친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상대역의 크고 작은 행복과 성공을 위해 지혜를 동원해주어야 하고, 그 행복과 성공의 과정을 십분 공유—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산발적인, 혹은 단기적인 모니터는 흔히 우리의 옷깃을 스친다. 그러나 세월을 함께 견디고 격려하며 상부상조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기란 쉽지 않다. 또한 심성과 자질이 안정된 자가 아니고서는 그런 모니터링 파트너와 맺어졌다 할지라도 결국 놓치고 만다. 자상한 모니터링 파트너를 만난 자라면 그는 이미 행운아다. 왜냐하면 신의 현신인 그 후원자는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천군만마의 힘과 빛을 실어줄 것이므로.
“알밤인가 하고 솔방울도 줍고, 알밤인가 하고 조약돌도 줍는” 게 우리의 인연 아닐까. 이 짤막한 동시에서 나는 일상에 얽힌 철학을 읽는다. 실망스런 존재가 되지 않으려 시시각각 자신의 내면을 정비하고 감독한다. 모니터링 파트너에게 90을 주고 10을 돌려받는다 해도, 그 90과 10은 서로의 인생에서, 그리고 둘 사이의 우정에서 각각 100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주고받음의 부피를 따지지 않는 게 지음(知音)의 진면모다. 평면적인 내 문장의 허를 찔러 입체의 효과를 살려내는 언니가 있어, 동생과 딸이 있어 나의 작문은 외롭지 않다. 언니와 나는 내일도 웃음을 끼고 남은 길을 걸을 것이다.
2009.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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