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읽은 나의 시

박대현_과거에의 대면을 통한 주체의 확장/『문파』정숙자 소시집(전문)

검지 정숙자 2022. 6. 16. 18:11

< 계간 『문파』 2022-여름(64)호 <소시집/ 정숙자 시인의 신작시와 시작 노트 & 작품론/ 박대현 > 전문

 

 신작시 5편/ p. 101-10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7

 

    정숙자

 

 

  매일 마음으로 쓰는 편지는

  어떤 새가 당신께 전해주나요?

 

  기도의 봉투에 곱게 쌌지만

  주소도 우표도 없는 편지를

 

  당신의 우체부는 눈이 밝아서

  이름자만 보고도 길을 아나요?

 

  단 ᄒᆞᆫ 번 눈 속에 피는 흰 꽃을

  넣어 보낸 편지도 받으셨나요?

  (1990.7.5.)

 

        

 

 

  슈뢰딩거의 상자 속에 넣어두었던 세월 저쪽의 고양이가 어찌 됐나 뚜껑을 열어봤더니, 아직도 어리디어린 그대로의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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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8

 

 

  사랑은 노상 저를 버리고 당신한테로 달려갑니다. 새가 껍질을 버리고 창공으로 날아가듯이. 붙잡고 가두어도 소용없는 일, 한 번 떠난 제 마음은 한뎃잠을 ᄊᆞᇂ으며 돌아오지 아니합니다. 꿈엔 듯 스치우는 바람결에 앞산 뒷산 가랑잎 부서집니다. (1990.7.6.)

 

      _   

 

 

  타고르와 릴케와 헤세를 읽던 시절

  흰 벼루와 까만 먹과 창백한

  갈필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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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9

 

 

  어디에도 팔지 못한 눈물이 노래가 되었습니다. 지난날 흘린 피만큼이나 붉고 푸른 한밤의 노래···. 조각달에 한두 자 실었사오니, 산들바람 뜨락에 서성이거든 당신의 작은 ᄎᆞᆼ문을 조금만 조금만 열어주세요. (1990.7.6.)

 

        

 

 

  저렇게 기도하던 날이 있었구나

  뮤즈를 향해

  간절히!

 

  그거 하나를

  스승은 날

  믿으셨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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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0

 

 

  지렁이한테도 운명이 있음을 바라봅니다. 철조ᄆᆞᆼ에 걸린 그의 시신이 걸음을 놓아주지 아니합니다.(1990.7.8.)

 

        

 

 

  새롭게, 새로운 흐름 속으로

  이 이 저 이 앞다투어 합류하는 강

 

  도리어

  홀연

  귀거래혜歸去來兮 지었던 묵객도 얼비치는 강

 

  ‘풀리는 한강가에서*

  해 질 녘

  서울 하늘을 뜯어봅니다

 

   * 서정주의 시 「풀리는 한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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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1

 

 

  슬픈 추억은 숨어 있어도 좋으련만, 질투라도 하는 양 되돌아와 모처럼의 행복을 그르치고 맙니다. 하지만 목메어 젖어버린 이 꽃다발이 제게는 진짜 꽃ᄃᆞᄇᆞᆯ입니다. (1990.7.10.)

 

     _   

 

 

  카를로 로벨리(이탈리아, 1956~)의 양자 얘기는 우리에게 하 많은 자유를 가능케 해주었습니다. 30여 년 전의 저 공간에서, 그 이전에서라도 저는 폭 고꾸라져 죽었던 건 아닐까요? 죽은 줄도 모르고 허청허청 걸어온 육체가 아닐까요?

 

  웬일인지, 여기가 꼭 커다란 무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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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노트/ p. 105-107>

 

    합명제에서의 재출발

 

 

  2022-1988=34, 이것이 현재 시점과 필자의 등단 연도를 헤아려 본 결과다. 왜 이런 셈을 해보게 되었을까. 독자는 물론 본인에게도 답해야 할 지점이 아닐까 싶다, 까닭인즉, 앞서 제시한 5편의 신작新作, 첫 연이 모두 90년대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필자 역시 등단 이후 좀 더 나은, 좀 더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 주의를 집중해왔다. 첫 시집의 표제가 『하루에 한 번 밤을 주심은』(1988)이라는 점만 보더라도 얼마나 스스럼없는 언사인지가 금방 드러난다. 다섯 번째 시집에 이르러서야 모더니티(modernity)에 접근, 『감성채집기』(1994)를 엮었다. 이후 끊임없는 반성과 실험에의 시도, 구조주의에서 포스트 구조주의 이론이 육화되기까지 정진에 용맹을 얹었다 해도 빈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사전에서 쉽사리 찾을 수 있는 ‘아방가르드(avant-garde)’의 뜻을 모르는 이는 아마도 없으리라. 이는 예술용어이기도, 군사용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의미는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군사용어일 경우의 전위대, 즉 최전선에서 영토확장을 위해 싸우는 군인을 뜻하는데, 최전선에서 적진을 뚫고 나아가는 군대의 목적은 영토의 확장도 확장이려니와 후방의 안위와 사수死守에도 있음이다.

  그러므로 자타를 막론하고 전위대에 속했을 경우, 그는 분명 전쟁에, 최전방에 투입된(자원했을지라도) 사람이며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결여缺如된 상태다. 신의 가호로, 또는 뛰어난 전술과 지략으로 승전한다면 누군가는 역사를 빛내는 영웅이 될 테지만, 그 반대의 처지에 놓인 누구‘들’은 안타깝게도 도도한 사조 아래 묻히게 마련이다. 예술세계라고 크게 다를 리 없다.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작품을 위해 혼을 사르는 우리들!

  예술에서의 영토란 흙-대지가 아니고, 넋-지구의에 나타나지 않는, 마음과 정신이 지향/표출되는 세계이므로. 그 최초의 영토는 개개인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되는 고유 공간이자 고유 테마(thema)인 셈이다. 거기서 생성된 작품이 공감의 폭을 넓혔을 때 개인에게는 상징적 자본과 영예가, 만인에게는 공동유산으로서의 탑과 영원이라는 시공이 주어진다는 점을 바로 지금 헤아려 봐야 할 것만 같다.

 

  이쯤에서 헤겔의 변증법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변증법적인 사고는 <전개되었다가 다시 스스로에게로 되돌아오는> 사고다. 「자연 안에 있는 씨앗은, 스스로를 하나의 다른 것他者으로 만든 후, 다시 통일 안에서 합쳐진다. 정신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된다. <그 자체로서(an sich) 있는 것이 정신을 위한 것으로 되고, 이렇게 해서 정신은 자기 자신을 위한(fur sich selbst) 것으로 된다.」”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지음, 강성위 옮김 『서양철학사』 하권·근세와 현대. 1987-3판 발행. 593쪽/ 以文出版社)

 

  그리고 또 하나, 카를로 로벨리의 ‘루프양자중력’이라는 시간 개념이다.

 

  “온 우주에 공통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과거-현재-미래 순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부분적’으로만 순서가 있을 뿐이다.”(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2020-초판 28쇄 발행. 200쪽/ 쌤앤파커스)

 

  우리는 그간 이론과 실제에서 탈주·도주·되기와 비선형적 구조를 익히 보아왔고, 수용했고, 적용해왔다. 2000년대 초 일군의 아방가르드 시 작품과 시인은 마치 혜성과 같았으며, 강렬한 매혹과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명실상부 변화였고 발전이었다. 첨단 이론의 발원지인 서구의 작품들보다도 우리 시가 훨씬 뛰어나 보였다. (번역본을 읽었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초기 시 이후 가파른 메타포(metaphor)와 애매성(ambiguity), 알레고리(allegory) 등의 체득을 위해 20여 년 동안 전념했다. 결국, 꿈꾸었던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2017)을 낼 수 있었다. 폐일언지하! 그 지점이 필자의 필묵의 분수령임을 지각한다. 때마침 오래전에 써 놓고 펴내지 않았던 「공우림의 노래」에서! 현대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간절성懇切性과 진솔眞率, 순수 등을 다시 만났다.

  필자에게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허물 수 없는 경계란 없다” & “종합명제에서의 재출발”을 실현해 보라, 고 부추긴 건 무의식으로부터의 건드림이며 열림이었던 것 같다. 30년 저쪽의 원고를, 한 편의 시에서 고리 잇는 이 작업은, “시간은 사실 연속된 ‘선’이 아니라 흩어진 ‘점’”(카를로 로벨리, 앞의 책)이라는 ‘열적 시간’과 ‘변증법’을 접목해보려는 욕구이기도 했다. 이로써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공우림의 노래」에 대한 약간의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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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론/ p. 108-113>

 

    과거에의 대면을 통한 주체의 확장

 

    박대현/ 문학평론가

 

 

  정숙자의 시 5편은 과거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시다. 무려 30여 년 전의 시편들을 읽고 그에 대한 감상평을 덧붙이는 형식이다. 그의 시는 소박하지만, 우선 과거의 자신을 대면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지닌다. 5편의 시들은 모두 30여 년의 미발표작들을 현재의 시간으로 견인함으로써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을 통합하고 있다. 시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과거와 현재의 변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인은 이 변증을 통해 재출발의 새로은 기운을 시적 주체에게 선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시작 노트합명제에서의 재출발은 시 5편에 반영되어 있는 시인의 사유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시인은 30여 년 전의 시를 들여다보면서 과거의 시인과 현재의 시인을 아우르는 시적 주체를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미래에 있고, 현재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과거 속에 있다. 그렇다면 보다 확장된 주체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없다. 확장된 주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괄한 경우에라야 실현 가능하다. 확장된 주체는 과거, 현재, 미래가 활발히 교락交洛을 이루면서 통합되는 보다 온전한 주체다. 그리고 그러한 주체는 미래가 끊임없이 열려 있으므로 언제나 과정으로서 존재하는 주체다.

  과정으로서의 주체,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인간의 주체를 과정으로 정의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견해는 이미 신경과학에서 오랫동안 주장되어온 것이다. 예컨대 제럴드 에델만과도 같은 신경과학자들은 인간의 자아를 과정으로 정의한다. 인간의 자아가 출생과 더불어 일정한 형태를 갖춘 것이 아니라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면서 자아의 형태는 얼마든지 변한다는 것이다. 최근의 신경과학에서 주목하는 커넥톰(Connectom)이라는 개념은 인간 주체의 신경망적 구조의 실체와 더불어 그 변화의 가능성, 즉 가소성(Plasticity)의 실체를 보여준다.

  정신분석과 신경과학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의 자아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항구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아에 깃든 본질주의적 환상은 정신분석과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배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며, 대신 본질주의적 환상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주체라는 용어가 보다 적확한 용어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정숙자의 시 5편은 서정시적 성격이 매우 강하지만, 30여 년 전 시와의 대면을 통해서 현재의 시적 주체에 잔잔한 파장을 몰고 온다.

 

 

  매일 마음으로 쓰는 편지는

  어떤 새가 당신께 전해주나요?

 

  기도의 봉투에 곱게 쌌지만

  주소도 우표도 없는 편지를

 

  당신의 우체부는 눈이 밝아서

  이름자만 보고도 길을 아나요?

 

  단 ᄒᆞᆫ 번 눈 속에 피는 흰 꽃을

  넣어 보낸 편지도 받으셨나요?

  (1990.7.5.)

 

       _   

 

 

  슈뢰딩거의 상자 속에 넣어두었던 세월 저쪽의 고양이가 어찌 됐나 뚜껑을 열어봤더니, 아직도 어리디어린 그대로의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7」 전문

 

  이 시는 두 개의 시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의 텍스트와 현재의 텍스트. 현재의 텍스트는 과거의 텍스트를 읽고 난 후의 감상이다. 과거의 텍스트가 199075일에 쓰인 것이라 기록되어 있으니 무려 32년 전의 것이다. 시인의 등단 연도가 1988년이니 등단 초기의 미발표 텍스트에 해당한다. 시인의 과거 모습은 먼 기억과 오래전의 시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인의 주체는 먼 길을 떠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과거의 미발표 시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던 자신과의 낯선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현재의 시인은 30여 년 전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감상을 남기고 있는데, “아직도 어리디어린 그대로의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라는 진술이 그렇다. 30여 년 전의 시적 주체를 현재의 시인은 마주하고 있다. ‘아직도라는 부사어를 통해서 시인의 기대했던 바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시인이 상실하고 없는 결핍의 대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은 시작 노트합명제에서의 재출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때마침 오래전에 써 놓고 펴내지 않았던 공우림의 노래에서! 현대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간절성懇切性과 진솔眞率, 순수 등을 다시 만났다.” 이 문장을 통해 시인이 추구하는 시적 지향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30여 년 전의 시에 대한 대면이 자신의 잃어버린 시적 순수의 환기로만 끝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시작 노트에서도 이를 강조하고 있는데, 30년 전의 원고를 다시 들춰보는 까닭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연속된 선이 아니라 흩어진 점에 불과하다는 카를로 로벨리의 물리학적 세계관을 언급한다. 그리고 여기에 헤겔의 변증법을 접목하고 있다. 시인이 언급하고 있는 변증법은 과거와 현재의 시를 통한 시적 변증법이다.

  시적 변증법을 통해 시인은 시적 주체의 변형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시적 주체의 좌표를 현재에서 이탈시키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시인은 현재에 묶여 있는 시적 주체의 한계를, 과거의 시를 대면함으로써 벗어나고자 하는 것 같다. 시인의 이러한 시도가 단순히 과거 주체로의 회귀를 뜻하지는 않음은 그의 시작 노트를 통해 확인한 바다. 시인이 도모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시적 주체와 현재의 시적 주체를 아우르는 무엇이다. 현재의 와 과거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포괄하는 시적 주체는 현재에 묶여 있는 주체의 한계선을 확장한다. 이 확장 속에 시인의 습득한 새로운 세계관이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인간의 의식은 기본적으로 현재에 묶여 있다. 주체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의식은 지금 현재에 작동하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의식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시간 길이는 현재의 시간 길이에 바탕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시간 길이는 의식이 작동하는 시간의 기본 단위라고 할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에 따르면 현재의 시간 길이는 약 2초.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은 2초를 기본적인 시간 단위로 하여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 2초 정도의 의식이 인간의 주체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다. 그러나 2초 단위의 의식은 과거 기억의 정보와 미래 예측을 통합하는 의식의 연속적인 선형성을 이루면서 의식의 길이를 확장한다. 이로써 의식에 기반한 자아는 자신의 자아에 대한 즉각적인 의식으로서의 최소 자아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 진술하는 과거와 미래의 이야기들 속에서 이어지는 일관된 자아의식인 서술 자아까지 형성할 수 있게 된다.1) 의식의 길이가 연장되면서 인간은 사유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유하는 인간 주체의 의식 역시 현재에 붙들려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인간은 현재에 붙들려 있으므로 지나간 과거와 미래의 사유를 현재성을 지닌 상태로 온전히 포괄할 수 없다. 이것은 4차원 세계를 살아가는 3차원적인 인간의 한계다. 인간은 시간의 축을 거슬러 가거나 시간의 축을 따라 더 빨리 가거나 천천히 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인간은 시간에 종속된 현재적존재다. 이는 데카르트 좌표(Cartesian coordinate)에 시간축(t)을 얹은 민코프스키의 시공간 개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민코프스키의 시공간 개념 속에서 인간 의식은 언제나 현재에 위치한다. 인간은 4차원의 공간(x, y, z, t) x, y, z 축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으나, 민코프스키의 4차원의 시공간 속에서 t라는 시간 축은 남나들지 못한다. 다만 기억의 환기와 미래의 예측을 통해서 의식의 확장을 도모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과거, 현재, 미래를 포괄하는 주체의 구성은 가능할까?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주체에 대한 상상은 가능할 것이다. 베르그송의 순수기억은 과거의 주체를 포괄함으로써 주체를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그러나 미래의 주체를 포괄하고자 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미래에 대한 예측은 가능할지라도, 그것 역시 현재에 기반한 주체 의식의 산물일 뿐이다. 현재로서 실현 가능한 주체의 확장은 과거의 주체를 현재의 시간 속에 불러내는 것 정도다.

 

 

  슬픈 추억은 숨어 있어도 좋으련만, 질투라도 하는 양 되돌아와 모처럼의 행복을 그르치고 맙니다. 하지만 목메어 젖어버린 이 꽃다발이 제게는 진짜 꽃ᄃᆞᄇᆞᆯ입니다. (1990.7.10.)

 

      _   

 

 

  카를로 로벨리(이탈리아, 1956~)의 양자 얘기는 우리에게 하 많은 자유를 가능케 해주었습니다. 30여 년 전의 저 공간에서, 그 이전에서라도 저는 폭 고꾸라져 죽었던 건 아닐까요? 죽은 줄도 모르고 허청허청 걸어온 육체가 아닐까요?

 

  웬일인지, 여기가 꼭 커다란 무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단 말입니다.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1」 전문

 

 

  역시 쓰인 시간 층위가 다른 두 텍스트의 결합이다. 시인은 1990710일에 쓴 시와 그 시를 읽고 쓴 현재의 감상이 시간의 연속적인 선 위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현재는 이 우주 전체에는 적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를 통합하는 현재의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는 우주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일종의 착시 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래로 이동하다 보면 과거로 되돌아가는 현상이 벌어지는 곳이 우주라는 사실을 강조한다.2)

  시간의 일방향성으로부터의 이탈은 시인의 상상력에 많은 자유를 선사한다. , 과거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루트비히 볼츠만의 주장을 감안할 때, 인간이 세계에 대한 무지를 넘어선다면, 그리고 확장된 주체를 형성할 수 있다면, 카를로 로벨리의 말처럼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은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 카를로 로벨리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사건들 전체를 뜻하는 확장된 현재를 상상한다. 이 확장된 현재로부터 형성된 주체가 있다면 그것 역시 확장된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30여 년 전의 시를 대면함으로써 시작詩作의 단순한 회고를 넘어서 보다 확장된 주체를 도모하고 있다. 비록 소박해 보이는 작업이지만, 확장된 주체를 향한 열망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시인의 확장된 주체는 다세계적 상상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인이 언급하고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물리학이 가지고 있는 모순을 일상적 현실 속에서 명쾌하게 드러낸 것이지만, 오늘날의 양자물리학은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모순적 허구가 아니라 실제라는 주장까지 나아가고 있다. 이 세계는 죽어 있는 고양이와 살아 있는 고양이로 분기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흔히 평행우주론으로 언급되는 다세계 해석(Many-Words Interpretation)이다. 이 세계에는 죽어있는 고양이의 세계와 살아있는 고양이의 세계로 분기하듯이, 매 순간 서로 다른 결과의 세계로 끊임없이 분기한다. 그러므로 지금 살아 있는 , 30년 전 죽어버린 의 유령일 수도 있다. 시인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연속성에 붙들린 주체의 한계선을 넘어서 주체의 자유로운 확장이 가능해지는 세계관의 열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1) 조지프 르두, 강봉균 역, 『시냅스와 자아』, 동녘 사이언스, 2017. 47쪽.

  2) 카를로 로벨리, 이중원 역,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쌤앤파커스, 2019. 1부 3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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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문파』 2022-여름(64)호 <소시집/ 신작시 5편/ 시작 노트/ 작품론>

* 정숙자/ 1988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열매보다 강한 잎, 산문집 밝은음자리표. 질마재문학상, 동국문학상 등 수상

* 박대현/ 2005년 ⟪부산일보⟫ 평론 등단, 평론집『헤르메스의 악몽』 『우울한 것의 추락』 『황홀한 아파니시스』외, 2019년 부산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