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읽은 나의 시

편지_ 오직 한 사람의 시인이기 위하여/ 류미야

검지 정숙자 2020. 12. 17. 00:57

 

<편지>

 

    오직 한 사람의 시인이기 위하여

    -정숙자 선생님께

 

    류미야

 

 

  처음 선생님을 뵌 건 수년 전, 한 문학 행사에서였습니다. 정갈하게 비다듬어 틀어 올린 은발과 멀리서도 형형한 눈빛은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모습이셨지요. 이후 이런저런 문학의 일들로 더러 뵙는 동안 왠지 제 마음속에는 큰 바위 얼굴의 상이 떠올랐습니다. 너새니얼 호손의 동명의 소설 제목이자 주인공 어니스트가 일생 기다리며 꿈꾼 위대한 인간, ‘큰사람의 상징이지요. 높은 생의 가치를 향해 나아가다 보면 결국 그에 근사近似해진다는 다분히 교훈 짙은 주제로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 ‘시인나의 생활은 나의 사상과 일치하지 못했음을 말하는 대목과 어니스트가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착한 사람이 큰 바위 얼굴 같은 용모를 가지고 빨리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속으로 기원한다며 끝맺는 부분에 늘 마음이 가닿습니다. 보르헤스의 평처럼 이는 깊은 상징들로 가득한 우화입니다. 그 속에는 뒤척이는 보통의 삶들과, 드높은 가치를 구하는 삶 그리고 그렇게 사는 일에 대한 물음들이 동시에 들어 있지요. 이야기 속의 시인은 성속聖俗을 오가는 인간적인 한계를 지닌 인물이지만 그런 자기 존재를 아는 인물입니다. 또 성실함(earnest)과 정직함(honest)의 뜻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주인공 어니스트(Ernest)위대한 겸허도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선생님을 마주할 때마다 그 이미지가 중첩되는 것은 아마도 선생님의 삶과 철학, 실천이 맞물리며 빚는 맑고 따뜻한 힘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삐걱거리는 의 모순된 속성이 합일된, 그 서늘함과 돈후함이 곁에 선 이의 마음을 조아리게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단지 행위를 넘어선 탐진치貪瞋痴 그득한 삶을 향기로 채우려는 지극한 애씀이라는 점에서 더욱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영혼의 노작인 수많은 시집들에 일일이 손편지로 답하는 지극, 버려지는 종이들을 가리고 꾸려 공책이나 메모지의 새 생명으로 탄생시키는 지극, 걷거나 이동하는 길 위에서도 책을 가까이하는 지극, 무엇보다 자기갱신의 시작詩作에 이르기 위해 분투하는 지극 등 촌음을 아껴 쓰는 그 지극의 마디마디가 정성만이 인생을 영원으로 만든다.”고 한 그 괴테의 말과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 얼마 전 격려로 건네주신 재활용지로 꾸민 수제 노트는 제 책상 머리맡에 죽비처럼 놓여 있어요. 그 안에 담긴 두터운 마음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옷깃 여미는 일밖에 없지만, 아득한 그 깊이 앞에 서보는 일만으로도 저의 시간은 그득해집니다.

  그런 한 사람의 애씀이 무에 가까운, 소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겨우가 아님을 믿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의 마음, 시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자만이 시인이어야 할 것입니다. 시만이 인간 삶의 유일한 가치임을 단언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적어도 진실과 정성, 생명에 대한 강력한 책무와 애틋함을 느끼며 생의 지순함에 복무해본 자만이 궁극으로서의 시를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해도 생은 망망바다나 사막처럼 막막하고 외로운 법이지만, 외로움이 두려우면 정의로울 수 없음을 늘 생각하는 시인의 호젓하고 장엄한 쓸쓸함을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그런 의롭고 외로운 단 한 사람의 시인이기 위하여 애써 고독한 길 위에 늘 서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을 뜻하는 공검空劒, ‘허를 찌르는 칼이라는 말도 그래서 만드신 건 아닐까요? 빈 곳을 채우려는 자가 빈 곳에서 세계를 보고 상대하는, 단지 눈앞에 없는 어떤 것들로 서럽지도 부럽지도 외롭지도 않은 시인의 자리를 말씀하시려던 건 아닐까요?

  왠지 그런 마음들이 오롯이 잘 담겨 있는 듯한 선생님 시의 일부를 옮겨 적는 것으로 오늘 이 편지를 맺을까 합니다. 선생님 건강 잘 여미시다 머지않은 날 아무렇지 않게 또 뵈올게요.

 

기습적인 칼은 이길 수 없다/ 어느 땐가를, 전후를 돌아볼 틈도 없이/ (…)/ 그래, 그런데도 난 혼자가 아니다/ (책을 읽는 한 혼자 사는 것도, 혼자 눕는 것도 아니다.)// 책과 책들과 함께 하는 한/ 바람 우짖는 거리에서도 나는 solo가 아니다

  -정숙자, 「책-pet」 부분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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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 · 서울⟫ 제230호 2020년 12월 문학인이 띄우는 편지 18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