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읽은 나의 시

김윤정_주름 접힌 세계, 그 속에서···(발췌)/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7 :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23. 6. 26. 02:43

 < 계간 『예술가』 2023-여름(53)호 <계간시평/ 김윤정: 주름 접힌 세계,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시학 > 中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7

 

     정숙자

 

 

  잠 깬 나비가 언덕 위로 날아갑니다. 거미줄마다 이슬이 빛납니다. 바다는 새로운 오선지를 펼쳤습니다. 따로 예술이 필요치 아니합니다. 종이와 펜을 내려놓습니다. 저 또한 스스러울 것 하나 없는 바람이 됩니다. 오랜 소원 이루는 찬란ᄒᆞᆷ이여, 순수는 저의 궁극의 이상입니다. (1990. 9. 8.)

 

           

 

 

  이 삼경 어찌해야 전해질까요?

  벼루가 닳아진들 글이 될까요?

 

  붓끝에 뭘 먹이면 꽃이 될까요?

 

  밤은 자꾸자꾸 동으로 흘러

  창문에 푸른 물 비쳐드는데

 

  어떻게 갚아야 갚아질까요?

  죽어서 갚아도 갚아질까요?

 

  이 침묵 어찌해야 뜻이 될까요?

    -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7」 (『예술가』, 2023 봄) 전문

 

  

  주름 접힌 세계,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시학(발췌) _김윤정/ 문학평론가

  신을 향한 초월적 표상이 무의미한 세계에서 인간의 구원은 어떻게 가능할까? 인간의 외부에서 인간을 부정하게 하는 초점자로서의 신이 동일성 철학을 대변하는 것이었다면, 들뢰즈는 이를 거부하고 세계 내의 내재적 사건에 주목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의 실상은 동일자 대신 무수한 차이들과 그들의 반복으로 구성되며 그러한 차이의 반복들이야말로 그 지대를 사건의 지점이자 특이성의 장소로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 속에서 완전무결하게 일치하는 사태가 발생할 리 없는 대신 모든 사건들은 반복될 수 있으되 차별화되어 반복한다는 사실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자 다양성에 대한 옹호라 할 수 있다. 이를 세계의 주름(pli)이라 일컬었던 들뢰즈는 무한한 반복, 더 정확하게는 무한한 차별적 반복이 발생하는 주름의 지대야말로 사건이 잉태되는 생명의 장소이자 초월적 신의 자리와 구별되는 세계의 내재성의 지점이라 말하였다. 그곳은 인간의 세계이자 사태가 생기하는 생성의 자리이며 생명의 지대다. 들뢰즈는 신이 부재하는 시대에 그러한 생성과 생명의 장소야말로 인간 스스로의 구원이 가능해지는 지대라 하였다.

 

  들뢰즈의 이러한 관점은 자의든 타의든 신에 대한 표상화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 현대의 오늘날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가능한가에 관한 하나의 진실을 말해준다. 인간의 구원은 외부의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바로 이 세계, 인간 스스로들의 무한한 공존이 이루어지고 그들의 다양한 존재태가 깃드는 여기에서의 생성의 에너지에 의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곳이야말로 세계에 내재하는 생명성이며 세계 내의 힘의 응집소에 해당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이러한 주름(pli)의 지대는 모든 접힘과 펼침이 무한히 중첩되면서 외부와 구별되는 내재적이고도 동시에 외재적인 특수한 시공성을 이루게 된다. 특이성의 지대라 일컬어지는 다양성의 반복이 이루어지는 고유하면서도 특수한 지대는 곧 생성으로서의 무한한 힘이 발현되는 사건의 지점이다. 이곳에서 인간은 비로소 생의 에너지를 경험하며 온전히 숨 쉴 수 있게 된다.

 

     (···) 

 

  앞서 생명의 지대로서의 특이성의 의미에 대해 언급했거니와, 37편의 연작으로 이어지고 있는 ‘공우림空友林의 노래’에서의 ‘공우림’이 곧 이미 살펴본 특이성의 지대에 대한 개념화라고 일컬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공우림空友林’이 일반적인 일상의 지대와 구분되는 고유하고 특수하며 신비로운 시공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비어 있으되 가득 차 있고 또 그 때문에 ‘벗’이라 여길 만한 독특한 시공성을 ‘공우림空友林’은 창출하고 있다. ‘공우림空友林’이라는 조어는 그곳이 지니는 시공성의 특수함을 지시하기 위한 시인의 의도에 따른 것인바, 그러한 시인의 배려가 없었더라면 흔히 자연으로 명명되고 특별할 것 없이 묘사되는 그들 존재들이 현대인들의 자동화된 시선을 끌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나비’와 ‘거미줄’, ‘이슬’, ‘바다’들이 펼쳐 내는 풍경을 가리켜 “예술”이라 일컬은 것도 이와 관련된다.

 

  위 시에서 보여 주는 ‘공우림’에 다가가는 시인의 태도는 실제로 예술 현상학에 부합할 만하다. ‘공우림’ 내에서 존재들은 단순한 사물이나 미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시간과 공간의 지평에서 최대한의 몸짓으로 살아가는 실체들이다. ‘공우림’에 기거하는 이들은 그곳에서의 오랜 생존의 역사를 이어온 존재들이다. 이는 그들 존재들의 자율적인 생존의 이치에 외부의 어떤 것도 관여하지 못하는 독립성이 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그들은 최대치의 자유와 밝음을 누리는 존재들이 된다. “잠 깬 나비가 언덕 위로 날아가”는 행위라든가 “거미줄마다 이슬이 빛나”는 사태는 인간의 상상도 환상도 아닌 그들의 객관적인 생리에 대한 사실적 인식에 해당한다. 이들이 보며 주는 모습들은 말 그대로 사건이자 사태라 할 만하다. 그것은 외부의 시각에서 볼 때엔 ‘바다’를 가리켜 “오선지를 펼쳤”다 하는 동화적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비롯한다. 이곳은 외부인이 미처 알지 못하는 생명의 거대한 우주와 역사가 펼쳐지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곳에 내재하고 있는 심층적인 생성의 힘은 그 생명력으로 인해 외부로 전달되기 마련이다. 이때 그것을 인식하는 자라면 그들의 생명성을 공유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는 곧 이 세계에 동화될 수 있는 자이기도 할 것이다. 그 앞에서 “종이와 펜을 내려놓”는 일은 우주적 존재 앞에서 자아가 느끼는 경이의 순간이자 생명으로 가득 찬 존재에게 보이는 외경심의 표현에 해당한다. 생명의 현현 앞에서 자아는 세계가 지나온 무한한 시간성에 의해 순간 정신의 아득함을 느끼며 자아의 무화(無化)를 그리고 무한한 환희를 느끼게 된다. 화자의 “오랜 소원 이루는 찬란ᄒᆞᆷ이여” 하는 영탄이 솟아나는 소이도 여기에 있다. 이는 자아가 무한한 시공성을 향해 진입하는 순간에 대한 포착이자 그러한 시공성 내에 존재하는 대상과 조우할 때의 정서적 상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것은 곧 예술가가 체험하는 미적 순간에 관한 현상학적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가리켜 화자는 그가 꿈꾸는 “궁극의 이상”이자 “순수”의 순간임을 말하고 있다.

 

  위 시에서 화자가 제시하는 언술의 대부분은 자아의 예술가로서의 체험의 순간에 관한 기쁨과 경이, 감동의 깊이와 무게에 관한 것들이다. “삼경”이 다하도록, “벼루가 닳”도록 “붓끝”을 벼리고 상상력을 기울이면서 화자는 고심을 더해 갈 것이고 그러한 고투야말로 대상에의 강렬한 체험에 따른 예술가로서의 번민에 해당한다. 위 시의 화자는 그가 경험하는 위대한 존재들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곧 그가 이 지상에 있는 이유이자 부채라고까지 말하고 있거니와, 이러한 그의 의식은 그가 지닌 예술가라는 속성에서 비롯할 터이다. 이는 화자가 자신을 세계의 한가운데에서 그곳에 내재하는 생명의 현현을 지각하고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자로서의 존재 의식을 지니고 있는 탓이리라. 그는 지금 곧 생명 에너지의 끝없는 생성이 이루어지는 숲의 중앙에 있는 것이다. (p. 시 199-200/ 론 194-195 (···) 20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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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가』 2023-여름(53)호 <계간시평> 에서

  * 김윤정/ 2007시현실로 평론 부문 등단, 저서 위상시학』 『21세기 한국시의 표정, 강릉 원주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