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뱅이의 춤/ 배교윤 앉은뱅이의 춤 배교윤 얼음 풀린 봄 땅 길섶마다 앉은뱅이로 앉았다가 봄이 떠나가는 날 노란 꽃잎 떨구고 미루나무 숲을 지나 천년에 닿기 위해 하늘로 오르는 군무(群舞) 언젠가 지하도에서 본 앉은뱅이 꼽추의 등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온 저 민들레 꽃씨들의 춤 * 시집 『내 마음의 풍광』에서/ 2003...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7
해피 버스데이/ 오탁번 해피 버스데이 오탁번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6
어금니/ 오탁번 어금니 오탁번 문갑 서랍을 정리하다가 내 어금니를 만났다 10년 전 충치로 뽑혀 조그만 곽 속에서 얌전히 잠자던 어금니를 충치균이 죽지 않고 살아서 하얗게 갉아먹었다 칫솔로 잘 닦아서 다시 잘 모셔두기로 한다 내가 만난 나의 유골! 10년 동안 캄캄한 어둠 속에서 충치균에게 살신공양하고 있는 ..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6
칼/ 이영광 칼 이영광 시를 쓰면서 사나워졌습니다 타협을 몰라 그렇습니다 아니, 타협으로 숱한 밤을 새워서 그렇습니다 약한 자는 나날이 악해져 핏발 선 눈을 하고 더 약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세월이라지요 날마다 지기 때문에 심장에서 무럭무럭 자라온 한 뼘, 칼이 무섭습니다 * 시집『아픈 천국』에서/ 2010...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4
유령 1/ 이영광 유령 1 이영광 이것은 소름끼치는 그림자, 그림자처럼 홀쭉한 몸 유령은 도처에 있다 당신의 퇴근길 또는 귀갓길 택시가 안 잡히는 종로2가에서 무교동에서 당신이 휴대폰을 쥐고 어딘가로 혼자 고함칠 때, 너무도 많은 이유 때문에 마침내 이유 없이 울고 싶어질 때 그것은 당신 곁을 지나간다 희망을..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4
날/ 이미산 날 이미산 게으르게 누워있던 칼이 내리꽂힌다, 도마 위의 고등어를 향해 배고픈 매의 눈알처럼 번쩍이며 피가 튄다 붉은 내장이 끌려나온다 도마 위에서 피 맛을 즐기는 저것은 칼의 혀 칼의 살 속으로 저며 드는 칼의 날 고등어를 자르고 고등어 속 바다를 자르고 바다 속 어둠을 자르고 어둠의 실핏..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2
꽃송이 꽃송이/ 이미산 꽃송이 꽃송이 이미산 내 방 벽지에 꽃송이 가득하네 잠시도 나를 떠난 적 없는 눈빛이네 여태 저들과 눈 한 번 맞추지 않았네 꿈속으로 초대한 적도 없네 손 내밀어 꽃송이 어루만지네 꽃송이들 흔들리며 내 앞에 쏟아지네 달려와 이불이 되네 꽃이 만발한 이불을 덮고 나는 여행을 떠나네 지난겨울..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2
당산나무/ 손한옥 당산나무 손한옥 오빠의 젊음을 삶의 한 막 속으로 접은 뒷장에 나의 시 한 편 오빠의 등 뒤에 꽃등불로 밝힌다 늘 푸른 나무로 서 있는 큰오빠는 내 고향의 당산나무 세 아름 되는 당산나무가 있다 그 아래를 지나갈 때는 면장님도 온몸을 오므리고 발자국 소리를 죽였지만 서울 사는 큰오빠가 바퀴 ..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07
가릉빈가/ 손한옥 가릉빈가 손한옥 어머니를 땅에 묻고 집으로 돌아오니 창 옆에 한 손으로 마지막 씻어놓고 간 신발이 있다 삭아서 더 말랑한 흰 고무신 한 켤레, 햇빛 속에서 얇은 양 날개가 팔랑거리고 있다 감자꽃이 피고 살구가 떨어지는 텃밭을 날던 어머니의 얇은 날개다 한 손으로 얼굴을 씻고 한 손으로 머리를..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07
미래의 유적지를 보다/ 김추인 미래의 유적지를 보다 김추인 관절이 아프다 누가 내 뼈마디에 쿵쿵 곡괭이질을 해 대는지 구멍들 파 대는지 몸이 욱신욱신 말을 걸어오고 있다 저 사진을 보시죠- 열 손가락뼈 관절 마디마디가 잘 조형된 설치물처럼 단아하다 오른손 장지 두 번째 관절을 지적하며 담당의는 새삼스런 일은 아니란 듯..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