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김광기_시적 구성의 미장센 효과(발췌)/ 연못 위에 쓰다 : 안도현

검지 정숙자 2023. 9. 11. 01:37

 

    연못 위에 쓰다

 

     안도현

 

 

  당신을 병상에 버리고 당신은 유리창 너머로 저를 버리고

 

  저는 밤마다 아무도 읽지 않을 이야기를 썼죠

 

  마당 가에 연못을 들였고요

  당신이 꽃의 모가지를 따서 한 홉쯤 말려서 소포로 보내주신다면 꽃잎을 물 위에 뿌려놓고 꽃잎이 물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바라보려 했죠

 

  당신은 오래 죽은 척 가만히 누워 있었죠

  발톱을 깎아 달라는 청을 둘어주지 못했어요

 

  연못 가에 앉아 제 발등을 바라보는 동안

  풀이 시들고 바람이 사나워지고 골짜기 안쪽에서 눈이 몰려왔어요

  당신의 장롱과 당신의 옷을 분리하고 당신의 부엌에서 당신의 수저를 떼어 내고 면사무소에 가서 이름을 지웠어요

 

  저는 이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문법을 잊고 마음껏 미끄러질 수 있게 되었어요

  쨍한 코끝으로 연못 위에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어요

 

  당신이 자신을 결박하고 돌아누워

  얼음장을 깔아준 덕분이죠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아서 좋은 단어들

  의미 없이 녹아버릴 돌멩이들

 

  연못을 덮은 얼음장 위에 얼음장을 덮은 눈 위에

    -전문(p. 307-309)

 

  시적 구성의 미장센 효과(발췌) _김광기/ 시인

  겨울 이미지가 가득한 안도현 시인의 시 「연못 위에 쓰다」에서도 화자는 누군가와 이별을 하고 있다.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일상적인 이별이 아니라 누군가를 영영 떠나보내고 있다. 깊고 깊은 연못에 정한이 그득 고이는 것 같은 생의 이별을 하고 있다. 그리고 화자에게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떠나는 그는 화자를 밤마다 잠들지 못하게 하고 둘만의 그 서사를 연못 위에 적게 한다. 꽃 편지를 쓰듯 많고 많은 이야기를 적어나가는 화자는 그를 떠나보내는 슬픔에 젖어 있기보다는 떠나가는 사람의 존재 의미를 가슴 깊숙이 또는 살아있는 생의 마디마디에 묵묵히 새겨놓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더 먹먹하고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 화자는 떠나보내는 사람과 함께 초월적 인간으로 정한이 그득 고여 있는 호수 위를 거닐 듯 재회하고 있다. "님은 떠나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는 어느 시구詩句의 의미처럼 화자는 그를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도 화자를 떠나지 아니한 듯하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놓은 깊고 깊은 배려의 은덕인 듯한 정한의 연못을 단단하게 덮은 얼음장 위에 새로운 터전이 만들어져 있다. 그곳은 모든 것을 다 녹이고 삭힐 수 있는 "연못"이 있고 그 연못을 보호하는 것처럼 단단하게 덮은 "얼음장"이 있고, 그리고 차갑고 단단할 것 같은 것을 포근하게 덮은 "눈"이 있는 곳이다. 그 위에서 화자는 그와 만남의 의미가 있었던 시간의 서사를 적고 있다. (p. 시 307-309/ 론 309-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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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과 사람』 2023-가을(11)호 <poem review> 에서

   * 안도현安度眩/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시 부문 등단, 시집『외롭고 높고 쓸쓸한』『북항』『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등 

   * 김광기/ 1959년 충남 부여 출생, 1995년 시집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를 내고 작품활동 시작, 시집『호두껍질』『데칼코마니』『시계 이빨』등, 시론집『존재와 시간의 메타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