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여름밤/ 김건영

검지 정숙자 2024. 1. 14. 18:32

 

    여름밤

 

     김건영

 

 

  물속에 있으면 비를 잊을 수 있다 침대도 편지도 없고 마른 것도 없다 몸을 한껏 펼친다 머릿속에서 눅눅한 페이지들이 천천히 녹아내린다 물속은 가득 차 있다 물고기들이 제 몸속으로 음악을 삼키고 있다 배 속에 진회색 구름이 차오른다 물속에는 갈림길이 없다 잠길 수 있다 물속에는 결빙이 없다 표정처럼, 얼음은 언제나 바깥부터 시작된다 목욕도 없다 가끔 숲이 있다 흔들리는 부드러운 나무들 물속에서는 옷장이 필요 없다 그 사이에서 물고기들은 헐벗거나 먹거나 마신다 말없이 그러나 물고기들은 음악을 풍기고 있다 수면이 얼어붙는 동안에도 풍만한 냄새로 가득 찬 움직이는 음표 물속에서 누군가의 뺨을 때릴 수 있었다면,

  상대방이 멈추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음악이 있다 물속에는 식탁이 없다 마주 볼 필요 없다 비명 없이 우리는 지느러미를 흔들며 서로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다 안녕 안녕

  그런 물속에 우리는 잠시 있을 수 있다

  -전문(p. 153)// 『다층』 2016-겨울(72)호 수록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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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층』 2023-겨울(100)호 <다층, 지령 100호 특집 -100> 에서

  * 김건영/ 2016『현대시』로 등단, 시집『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