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흙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 문태준

검지 정숙자 2024. 4. 4. 02:18

 

    흙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

 

     문태준

 

 

  오래 묵은 이곳에서는 흙을 들출 때마다 지렁이가 나왔다 문 열고 나오듯이 나와 굼틀거렸다 나는 돌 아래 살던 지렁이는 돌 아래로 돌려보냈다 모란꽃 아래 살던 지렁이는 모란꽃 아래에 묻어주었다 감나무 아래 살던 지렁이는 감나무 뿌리 쪽에 흙으로 덮어주었다 호우가 쏟아지고 내가 돌려보냈던 지렁이들이 다시 흙 위로 나왔을 때에도 이런 곳 저런 곳에, 살던 곳으로 되돌려보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두고 온 내 고향이 눈에 선했다 집터와 화단의 채송화, 우물, 저녁 부엌과 둥근 상, 초와 성냥, 산등성이와 소쩍새가 흙속에 있었다 어질고 마음씨 고운 고모들도 흙속에 살고 있었다 솟아오르려는 빛이 잠겨 있는 수돗물처럼 괴어 있었다 흙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 있었다

    -전문(p.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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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년간 『미당문학』 2024-상반기(17)호 <신작시> 에서

  * 문태준/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4년『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수런거리는 뒤란』『맨발』『가재미』『그늘의 발달』『먼곳』『우리들의 마지막 얼굴』『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아침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