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저녁놀을 보고
유종호
작년 추석에는 비가 내렸다. 보통 봄비나 가을비는 조용히 오는데 제법 요란하게 비가 내렸다. 그래서 비 오는 추석날은 처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하였다. 그러더니 밤중에는 요란한 청둥소리에 이어 번개도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였다. 같은 서울에서도 소나기가 억수로 퍼붓고 하천이 범람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햇볕이 쨍쨍 내려쪼이는 곳이 있다. 그러니 비 오는 추석도 지역마다 달랐을지도 모르나 내가 사는 양천구에서는 분명히 그러했다.
그런데 2022년 올 추석에는 저녁나절 온 하늘의 구름이 벌겋게 물들어 오랜만에 저녁놀을 보게 되었다. 다만 우리가 어려서 보았던 새빨간 놀이 아니라 분홍색에 가까운 엷은 놀이라는 점이 달랐다. 온통 서쪽 하늘 전체가 짙은 새빨간 놀을 드러내서 사람 얼굴이 벌겋게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다 할 놀이도 없었고 모든 것이 결여되어 있던 어린 시절 이런 자연현상은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왔고 그래서 기억에 남아 있다. 시골에서 보낸 시절이기에 더 절실한 경험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소년 시절에 읽은 시편에서도 놀은 타는 저녁놀로 나온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란 대목이 보이는 「나그네」나 "여기는 경주/ 신라 천년/ 타는 노을"로 시작되는 「춘일」 같은 박목월 시편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나뭇잎 지는 가을 황혼에/ 홀로 봐야할 연지빛 노을"이란 대목으로 끝나는 미당未堂의 「노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올 추석에 볼 수 있었던 엷은 분홍색 놀만을 본 사람들은 타는 놀을 노래한 시인들이 침소봉대와 과장을 일삼은 것이라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근래에 들어와서 내륙지방에서 타는 저녁놀을 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 어려서 보았던 짙은 하늘을 볼 수 없게 된 것과 비슷한 사정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푸른 하늘이 엷어지고 밤하늘에서 또렷한 은하수를 볼 수 없게 된 것은 사소한 것 같으면서도 거의 재앙 수준의 막대한 손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 외국인이 해방 전에 한국이 자랑할 수 있는 6가지 중에 한글이나 석굴암과 함께 짙푸른 가을 하늘을 들고 있다고 김성칠이 쓴 역사책에 나온다. 또 1944년에 『조선의 자연과 생활』을 펴낸 일본인 의학 교수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붉은 민둥산과 황량해 보이는 시골 정경에 실망했으나 곧 정이 들었음을 실토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을의 짙푸른 하늘과 맑은 대기에 반해서 전국을 여행하며 민속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죽 내세울 것이 없어서 가을 하늘까지 들먹였는가 하는 것이 젊은 날의 반응이었다. 그러니 30대 후반에 눈 많이 오고 겨울이 긴 북위 43도의 외국 도시에서 두 해 겨울을 나는 사이 생각이 바뀌었다. 11월에서 3월까지 거의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하면서 푸른 가을 하늘의 축복됨을 절감하였다. 그리고 외국인의 우리 가을 하늘 칭송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란 시인의 대목도 예사롭지 않게 다시 음미하게 되었다.
교회음악이 사실상 기독교의 힘이 되어주었다는 말에 공감한다. 마찬가지로 여름밤의 선명한 은하수, 짙푸른 가을하늘, 타는 저녁놀, 소나기 끝의 선명한 무지개가 우리에게 자연과 지상의 삶에 대한 외경심을 안겨주었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요 추억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지는 못하겠지만 세계적 자랑거리가 된 산림재조성에 흠집을 내지 않도록 하는 것도 우리의 시민적 의무라 생각한다. ▩ (p.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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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집·서울』 2022-11월(253)호 <문학의 향기> 에서
* 유종호/ 문학평론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의 집·서울」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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