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김복태 숲 김복태 자정을 넘은 부엌 어둠의 뿔이 자란다 희고 고요한 침묵이 살아 숨을 쉰다 파아란 사슴 한 마리 어둠의 숲 속을 걸어가다 멈춘다 파아란 뿔은 점점 자라서 꽃이 피고 새들이 모여든다 흰 바탕의 접시 안에 사슴이 뿔을 키운다 사과가 주렁주렁 매어 달리고 다람쥐들은 재주를 부린다 사슴이 .. 시집에서 읽은 시 2011.04.04
아홉 시 뉴스/ 김복태 아홉 시 뉴스 김복태 아홉 시 뉴스에는 갈고리에 걸린 소의 살점을 보는 일 장미의 가시에 아카시아 찔레의 가시에 찔린 오월을 건너는 일 수입 소에 밀려난 아버지의 황소 코뚜레 잡은 손과 힘줄 파르르 떨며 물대포에 쓰러진 오월을 건너는 일 큰 눈꺼풀 껌뻑이며 지친 소들이 죽어서도 다시 살아 또.. 시집에서 읽은 시 2011.04.04
퍼즐게임/ 김혜영 퍼즐게임 김혜영 갑자기, 하얀 고무장갑을 낀 커다란 손이 쳐들어왔어요. 엄마,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려요. 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불쑥, 금속 가위가 탯줄을 잘랐어요. 엄마와 난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 천장을 보았죠. 첫울음을 앙, 터트렸는데…… 주검과 탄생은 유쾌한 퍼즐게임 비닐하.. 시집에서 읽은 시 2011.03.30
행복한 나날들/ 김혜영 행복한 나날들 김혜영 시계 바늘은 규칙적으로 제 갈 길을 걸어갔다 당신은 까만 가죽 가방을 들고 출근한다 아이는 책가방을 등에 메고 현관문을 발로 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요일 늦은 아침 마리아가 아이를 낳았고 습관적으로 성당에 갔다 검은 제의를 입은 도미니코 신부님의 설교 지.. 시집에서 읽은 시 2011.03.30
가을 파로호/ 김영남 가을 파로호 김영남 저 호수, 호주머니가 없다 불편하다 뭔가 넣어두었으면 좋겠는데 너덜너덜한 생각 거두고 싶은데 심플 젠틀 모던 이런 단어들이 지나간다 내가, 호주머니가 되어보기로 한다 호수의 거추장스러운 손들을 모두 한번 거두어주기로 한다 갑자기 호수가 사라진다 거기에 맡겨본다 윤.. 시집에서 읽은 시 2011.03.26
강진만/ 김영남 강진만 김영남 파도는 파도와 싸워 빛난다. 싸워 빛나지 않는 것들은 파도가 아니다. 손을 높이 들고 날 초대하지 않고 싸울 때 파도는 더 빛난다 빛나는 것들은 빛나는 것들끼리 날카로운 것들은 날카로운 것들끼리 모이게 하자. 모아두면 서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끼리. 절벽 앞에서 거품도 뿜게 하자.. 시집에서 읽은 시 2011.03.26
수면인심獸面人心 -1 / 윤준경 수면인심 獸面人心 -1 윤준경 서울대공원에 있는 코끼리거북이는 102살, 에콰도르에서 수놈 두 마리가 함께 와 한 놈이 죽자, 남은 한 놈이 슬픔에 잠겼다.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울증에 걸렸다. 식음을 전폐했다. 고심 끝에 사육사는 2살짜리 붉은 코아티너구리를 거북이 울에.. 시집에서 읽은 시 2011.03.25
마른 잎의 사유思惟 / 윤준경 마른 잎의 사유思惟 윤준경 녹음이 짙은 여름날 숲에 들어 보셨나요 일찍이 져버린 나뭇잎들, 쓸쓸히 떠돌고 있습니다 푸른 나무의 그늘을 두고 죽음을 택한 잎새들 모든 빛나는 것 뒤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음을 알 게 합니다 처음 나무의 몸을 열어 지상에 봄을 가져온 잎들 역사의 뒤안길에 스러.. 시집에서 읽은 시 2011.03.25
낙타/ 심은섭 낙타 심은섭 문이 열리면 저 문이 열리면 난 사막으로 돌아가리라 녹슨 나팔로 폴카의 노래 부르며 신기루와 태양이 구워낸 모래알이 뒹구는 사막으로 돌아가리라 오아시스에서 놀다가 모래바람이 손짓하면 폭풍 속 모래의 나라 난 사막으로 돌아가리라 밤마다 나의 침실엔 모래 우는 소리 이미 모래.. 시집에서 읽은 시 2011.03.24
노인과 그 가문/ 심은섭 노인과 그 가문 심은섭 태백시 장성광업소 맞은편 태백중앙병원 611호 진폐증 환자실 한 노인이 사타구니 쪽으로 고개를 구겨놓고 누워 있다 그 병상 옆에 노인을 빼닮은 쉰 살 넘긴 노총각도 새우등을 한 채 누워 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병상과 병상 사이에 모여 앉아 지상에서 마지막 눈물로 죽음의 .. 시집에서 읽은 시 2011.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