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강인한_비평집『백록시화』/ 물 속의 사막 : 기형도

검지 정숙자 2023. 6. 30. 02:49

 

    물 속의 사막

 

    기형도(1960-1989, 29세)

 

 

  밤 세 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맛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 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맛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

 

  

  ▶ 기형도의 「물 속의 사막」 감상/ 빗물 속에는 슬픈 고향이 있다(발췌)_강인한/ 시인

  기형도의 시, 그의 시는 읽는 이의 가슴을 진한 슬픔에 젖게 한다. 서른 살의 이른 봄, 그는 심야극장에서 앉은 채로 죽음을 맞았다. 뇌졸중. 그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그를 아껴주던 누이가 교회에서 죽었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연세대 정법대학을 나온 그는 중앙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항상 '절망'을 노래하듯 입 밖에 내뱉었다. 냉소적인 성격의 시인은 불우한 가계의 일원이었다. 마치 에드거 엘런 포가 그렸던 몰락한 어셔 집안처럼.

  신문사에서 숙직을 하는 밤이었을 것이다. 장맛비가 유리창에 흘러내리고, 가로수의 푸른 이파리들이 바람에 날아와 부딪쳤다가 어디론가 떨어져 내린다. 밤 세 시에 빌딩에서 내다보는 도시의 길들은 물바다를 이루어 마치 온통 물의 길인 양물줄기가 사방에서 꿈틀거린다.

  자다가 한밤중에 문득 눈이 떠진다. 두 시, 혹은 세 시에 갑자기 무엇에 찔린 듯이 일러나 본 적이 있는가. 그 시간이라면 전날 밤부터 잠을 안 자고 철야 근무를 하다가, 또는 악몽에 놀라 깨서 맞닥뜨린 시간이라야 한다. 새벽이라기에는 너무나 이른 시간이 밤 세 시인 것이다.

 

   (···) 

 

  기형도의 시 「물 속의 사막」은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가슴 저리게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시다. 여름 밤 장맛비, 빌딩 안, 밤 세 시, 도심 속의 한 점 섬인 양 완벽하게 단절되고 구원이 닿지 않는 시간과 공간 속에 그는 갇혀 있다. 제목에서의 '사막'은 막막한 절망의 심정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금지된다.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통과하지 못한다" 등 부정 어법에서 끼치는 절망감은 흑백의 대비적인 풍경 속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시 속에서 "밤, 석탄가루, 검은 유리창"과 함께 "흰 개, 비, 비닐집, 환한 빌딩, 와이셔츠 흰빛"의 대비는 어쩌면 죽음과 삶의 경계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밤 세 시의 풍경 속에 유일하게 "푸른 옥수수잎"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과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을 뿐, '무정한' 희망이었을 뿐이다. (p. 시 336-337/ 론 137-138 (···)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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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인한 비평집 『백록시화』에서/ 2023. 6. 15 <포지션> 펴냄

  * 강인한(본명, 강동길)/ 1944년 전북 정읍 출생,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등단, 시집『이상기후』『불꽃』『전라도 시인』『우리나라 날씨』『칼레의 시민들』『황홀한 물살』『푸른 심연』『입술』『강변북로』『튤립이 보내온 것들』『두 개의 인상』, 시선집 『어린 신에게』『신들의 놀이터』『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 시 비평집『시를 찾는 그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