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근작시 274

시, 간의 첫발

시, 간의 첫발 정숙자 시간은 매 순간 첫발이다 1초도 낡지 않는다 다가오는 순간만이 아니라 지나간 여름조차도 늙지 않는다 우리를 에워싼 모든 사건은 첫 순간의 색채로 한자리에 꽂혀있다. 닳거나 늙는 건 바로 우리의 육체, 우리의 혼신을 탐탁잖게 여기는 사물들, 그리고 그들과 우리의 그림자라 해두자, 이름하여 시간이 흘러드는 입, 설령 주둥이가 없는 광물일지라도 그들을 꿰뚫고야 마는 시간은 첫발밖에는 없다. 영원히 신생아이며 미성년인 그는 또한 얼마나 무심하고 부질없고 청초한가. 간혹 우리 앞에 얼마나 눈부신 아침과 푸른 구름을 부려놓는가. 그에게 두 번째 걸음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삶에 좀 익숙해졌을까. 모든 시간이 첫발이니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대칭은 비대칭일 뿐, 비정상은 비정상일 뿐. 비..

꼰소*

꼰소* 정숙자 무성한 잎 모두 놔두고 왜 메마른 가지에 앉아 있을까 후박나무 기대어 홀로 어딘가 바라보는 새 야생이란, 조심성이란 저런 것일까 제 몸빛 꼭 닮은 삭정이를 골라 앉다니! 목숨 부지하기 힘든 세상인 줄 익히 안다는 거지. 우연히 눈에 띈 고갯짓 아니었다면, 나도 저게 새인 줄 몰랐을 거야. (무슨 생각 저리 깊을까?) 벌써 20분째 미동도 없이 저이가 혹 놀랄까, TV도 켜지 않고, 앨범에 담고 싶은 충동도 접고··· 숨죽여 바라보는 유리창 한 겹 사이··· 내 모습 또한 저이와 다르지 않다. 저이가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나대로 저이 앞에 무심無心을 다 쏟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가끔은 깃을 다듬네!) 몇 해 전 저기서 부화하여 날아간 직박구리는 아닌지. 서운했던 내 마음 늦..

꽃병 속의 피 & 시작노트

꽃병 속의 피 & 시작노트 정숙자 진전을 내재한다 견딘 만큼 비옥해진다 고뇌가 덜리면 사유도 준다 그 둘로 인해 지속적으로 연역/발아하는 깊이와 빛을 질투하는 신은, 회수한다 (진정 고독을 사랑할 무렵) 그렇다고 잃어진 그것을 위조해 가질 순 없다 저쪽, 또는 우연만이 생산/보급하는 그것은 캄캄하지만 자칫 죽음에 이를 수도 있지만 결국 깨고 보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혹자만의 혹자를 위한 그 두껍디두꺼운 어둠 속 광학,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석벽의 삶 속의 앎 - 전문,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0-8월호 시작 노트> 꽃병과 꽃의 관계. 물과 피의 관계. 삶과 조종弔鐘의 관계는 늘 미묘하다. 꽃병을 만든 이는 꽃병을 구상할 때 이미 꽃을 꺾고 있었던 게 아닐까. 꽃병은 조롱/어항과 다른 이치일..

풍륜(風輪)

풍륜風輪 정숙자 바람은 우리의 눈 속에 있다. 저마다의 눈 속에서 일어나고 불붙고, 각종 바퀴를 굴려 난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 협곡에 갇히거나 부딪쳐 파열하는가 하면 폭포에 섞여 울부짖는 날개를 허공에 흩뿌리기도 한다. 누군가에 의해 무언가에 의해 다차원을 건너온 바람이 한 겹 창문을 위협하는 밤, 신이 세운 건축물 고요를, 뼈대 실한 바큇살이 맹공하는 밤, 그 급습보다 빠른 정동은 우리의 문밖, 몸 밖이 아닌 우리의 눈꺼풀 밑 눈동자 가장자리에 낀다. 구식이었던가? 속 앓던 카프카가 사라지고 너무 신중했던가? 생각 많던 칸트도 물러가고 서로 선하기를 바랐던 키케로도 서풍에 실려 돌아가고, 배부른 자들의 독설만이 난무하는 지구 진화의 최전선 오늘 은, 온통 여기 저기 거기 이제 곳곳마다 투명 바리케이드..

책-펫

책-pet 정숙자 그림자와 나, 단둘이 걷는다 가로등과 나무들과 넷이 걷는다 아니지, 어둠도 있지, 다섯이 걷는다 막 스며드는 겨울과 낙엽과 핏기 잃은 토막-달, 여섯이 걷는다. (‘걸어간다’가 아니고, ‘걷는다’라고 흘린 까닭은 목적지가 없기 때문이야.) 몸무게가 빠져나간 발자국만이 따라오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바스러진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몸무게가 빠져나갔다면 날아와야 할 게 아닌가. 아니, 아니지, 그게 아니야. 몸무게가 실린 동안만 발자국은 살아있는 거였어. 몸무게가 빠져나가는 순간 발자국은 주검이 되는 거였어. 그런데 나는, 나는 걷고 있구나. 순간순간의 주검을 잊고- 순간순간의 주검을 잇고- 순간순간의 주검을 딛고… 풍장 되겠지. 언젠가는- 나도- 누구라도 종말은 풍장이고말고.) 나무도, ..

한쪽 귀에 걸린 마스크

한쪽 귀에 걸린 마스크 정숙자 코로나-19에서의 19는 2019년의 뒷자리 둘을 따 붙인 거라고 한다. 발생 시기는 12월이며, 최초 발생지역은 중국이다 미국이다 분분하다고 한다. 원흉으로는 박쥐? 원숭이? 에잇 뭐가 뭔지 알 리도 없고 모를 리도 없다고 한다. 그런 건 이제 더 캘 필요도 없다고 한다. 꾀꼬리? 뻐꾸기? 그네들은 왜 의심하지 않는 걸까? 왜 사마귀는 추궁하지 아니하는가? 혹 死魔鬼라서? 노상 마스크를 잊고 나가기 일쑤였는데 요즘은 거의 챙기는 편이다. 6개월 이상 시달리다 보니 웬만큼 손에 입력이 되었겠지만, 목하 날씨가 섭씨 30°를 오르내린다는 게 문자다. 아니 문제다. 오후 6시 43분 단정히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경을 끼고 산책로에 들어섰으나, 19시 4분, 그러니까 정확히 21분..

이슬 프로젝트- 47

이슬 프로젝트- 47 정숙자 지문 스캔/ 야트막한 축대 사이 두꺼비 한 마리 앉아 있다. 그는 아무것도 관심 없는 표정이다. 행인들 역시 그 앞을 스치지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들쑥날쑥 풀 틈에 어울린 이 사색가는, 물결같이 한결같이 묵묵하고 담담하다 몇 해 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느릿느릿 발걸음 옮겨 디딜 때. 산책로의 이 석가(石家)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 즉시 나는 그가 사색가라는 걸 알아봤고, 지나칠 적마다 손길을 나누는 벗이 되었다. 그는 그윽이 내 지문에 서린 슬픔과 바람, 언어 이전의 그리움까지를 읽어내고 알아듣는다. 그리고는 따뜻이 하늘로 전송한다. 어느 우주와 먼 시간을 건너 우리는 예서/이제 만난 것일까. 언제 또 작별할지 모르는 그를 마음에 두고 나는 꿈결같이 해 질 녘 길을..

슬픔족

슬픔족 정숙자 죽음 이후, 어떤 컬러가 전개될 거라는 추측은 관성이다 미래를 색칠하고, 그 문을 향해 걷거나 혹은 앓기도 했던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던 아침과 태양과 거울 죽음 너머의 배경을 간접체험으로, 어렴풋이라도 상정해보는 미터법 또한 죽음이 싫어서도 두려워서도 아닌 단지 활력의 관성일 따름이다 타성은 쉽사리 지지 않는다 급제동은 급발진과 맞먹는 돌발의 접점일 뿐… 삶이란 별 것 아냐 고요를 찾자 생사일여라잖니? 괴 바이러스가 멀리 널리 창궐하는 요즈막에도 (아직도) 양서류에게 파먹힌 달빛 골똘히 들여다보는 호메로스가 있다 이게 뭔데 이리 고통스러우냐 항해라는 것, 이게 뭔데… 왜 사뭇 목메어야만 하나? 인간을, 짐승을, 미물을 한 테마에 놓고 견줄 때마다 네 개나 되는 위장으로 되새김질하는 우공牛..

이슬 프로젝트-52

이슬 프로젝트-52 정숙자 코비드-19 & 플라톤/ ‘우한 폐렴’에 이어 ‘코로나-19’, 최근엔 ‘코비드-19’라고도 부른다. 이 모두 2019년 12월 중국 우한시에서 발생한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을 일컫는 용어다. 14세기 중엽 유럽을 휩쓴 페스트를 연상케 하는 이 급성 호흡기질환은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으며, 좀체 수그러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전 사회적, 전 지구적 현상인 까닭에 추상을 앞선 절박함으로서의 서사를 「이슬 프로젝트」에 적어두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시詩이자 증언인즉,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수도 없고, 모임에서도 개인 간 2m 거리 두기를 실행 중인 현재는 2020년 6월 하순. 일찍이 플라톤은 『향연』*에서 이런 경고를 했다. “저들은 신을 공격했던 ..

실재와 실제

실재와 실제 정숙자 알 수 없는 어느 공간에서, 나는 어둠과 두려움에 새파라니 떨고 있었지 왜 여기 홀로 있으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그 무엇도 모르는 채 온몸 가득 얼음을 채우고- 바람 휘감고- 갈라지고 있었지. 그런, 한순간 어떤 이가 내 몸을 감싸 안았어 나는 곧바로 녹아버렸지 부드럽고 따뜻하고 조용한 그 품속에서 얼음은 다시- 반짝- 숨이 돌았고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았으며 무섭지도 않던 거기서 문득 깨어났을 때 나는 몽땅 벌거숭이였지만 점차 알게 되었지 알 수 없는 어느 은하에서 나를 구해준 그분께서는 이곳 이 마당에서까지 온갖 것 내어주고 덮어주시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다시는 찾을 수도, 만날 수도 없는 곳으로 돌아가셨어 그분이 주신 모든 것 당연히 받을 걸 받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