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꽃 피는 날이면 죽란사(竹欄社)에 모이고/ 최장순(수필가)

검지 정숙자 2021. 11. 11. 02:19

 

    꽃 피는 날이면 죽란사竹欄社에 모이고

 

    최장순/ 수필가

 

 

  고전수필 「죽란시사서첩竹欄詩社書帖」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1762-1836, 74세)이 이숙, 채홍원과 더불어 시를 좋아하는 열다섯 사람을 선별하여 만든 동인회 회칙의 서문이다. 이들 세 사람보다 네 살 많은 사람으로부터 네 살 적은 사람까지로 한정시켜, 서로 가까운 거리에, 벼슬을 했거나, 그 뜻과 취미가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 동인을 결성했다.

  다산은 어지간히 꽃을 좋아했나보다.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번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한번 모이고, 서늘한 초가을 서지西池에 연꽃이 구경할 만하면 한번 모이고, 국화꽃이 피면 한번 모이고, 겨울이 되어 큰 눈 내리는 날 한번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꽃을 피우면 정기모임을 다산의 집 죽란사에서 갖기로 했다. 자연을 벗 삼아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술을 마시며 밤새 시를 짓고 읊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멋진 일이다. 수시모임이 있었다. 아들은 낳은 사람이 있으면 한턱 내고, 자제가 과거에 합격한 사람도 한턱내도록 했다. 그러다 보면 거의 매달 한 번씩 모이게 되었을 것 같다. 문정文情에 인정人情까지 어우러진 멋진 풍류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요즈음 장르 불문, 문학동인이 결성되고 합평회라는 이름으로 활발하게 모임을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아름다운 풍속이 면면히 이어져 온 영향이 아닌가 싶다.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의 고유한 행태의 문학활동이다.

  시대를 초월해, 생활의 예지叡智, 풍류, 사랑, 사회인식과 비판 등 폭넓게 쓴 아름다운 우리의 고전수필은 많다. 외국에서 비롯된 에세이 못지않은 수준 높은 글들이 잘 읽히지 않고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아타까운 일이다. 수필가 손광성은 자신이 편역해 엮은 『아름다운 우리 고전수필』에서 다음과 같이 그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다른 문학 장르도 그렇지만 수필에 있어서도 우리는 우리의 전통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수필로 알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서구식 수필이지 우리의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한 번쯤 우리 고전수필에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주제의 통일성, 구성의 논리성, 호흡의 장단과 문세文勢의 완급조절 그리고 간결한 표현미와 사물을 보는 관조적 시각, 문장의 리듬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글이 많다. 고전수필에서 현대수필이 놓치고 있는 가치이자 계승해야 할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죽란시사서첩」의 뜻을 모범으로 삼아 결성한 수필가들의 작은 모임, <북촌시사北村詩社>라는 동인회가 있다. 펜데믹으로 주춤한 요즘이지만, 스무 명 남짓한 동인들이 철따라 정기적으로 만나 서로를 격려하고 작품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다. 열린 마음으로 의견을 나누다 보면 나만의 세계를 보다 더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죽란시사서첩」의 취지가 오늘날에도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굳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면 어떤가.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 가끔은 긴장을 풀고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모임이라면 그것이 어떤 분야든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정서가 메말라가는 강퍅해진 세태를 보면서, 풍류와 한가로움을 즐길 줄 알았던 220여 년 전 정약용 선생이 주도한 동인회를 새삼 떠올려보는 오늘이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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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의 집 · 서울』 2021-9월(239)호 <고전에게 길을 묻다>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