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사
정숙자
셰퍼드 세인트버나드 러시안 허스키. 풍란 사란 춘란, 부모님 형제자매 배우자 자녀, 스승, 사랑과 우정, 그들 모두 진심을 채워 기울여 봤다. 그러나 그들 모두 달아나거나 죽거나 시들었다. 오로지 변함없는 대상은··· 책뿐이었다.
책은 최소한 백 년은 신의를 지킬 것 같다. 스스로 구기거나 불타거나 찢지 않고, 썩지도 않고, 기본적으로 기본적인 장소에 놔두기만 해도 그들은 토씨 하나, 따옴표 하나 버리지 않고 종이가 삭을지언정 뼈대를 바꾸지 않는다.
진시황처럼 뭔가 가지고 떠날 수 있다면, 나는 병마용갱兵馬俑坑이 아니라 병서용갱兵書俑坑을 지으리라. 읽은 책과 읽어야 할 책, 영혼의 나비이며 산맥이며 길이며 공기이며 태양인 책들을··· 허무사 실행하는 내 마지막 날에
내가 만일 내일 아침 주검으로 발견된다면
그는 분명코 허무사虛無死가 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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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 여는 세상』 2021-봄(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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