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속들이는 알 수 없어도
장이지
나뭇가지를 오가며
작은 새들이 서로 부르는 소리는
한 마리 큰 새의 노래가 된다.
밤의 들판을 기며 질질 짜는
무명의 벌레들이 내는 소리는
한 마리 큰 벌레의 슬픔이 된다.
낱낱의 이름은 모른다.
낱낱의 소리는 모른다.
저마다의 조음기관을 속속들이는 알 수 없다.
이상하다. 나는 내가 그 큰 새라고 느낀다.
내가 그 큰 벌레라고 느낀다.
내가 나무이고 밤의 들판이고
소리의 알이라고 느낀다.
속속들이는 알 수 없어도 알고 있는 것만 같다.
발끝을 모으고
조금은 옅어진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끝나자마자 알게 될 낯선 음악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추운 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과 눈 맞춰본다.
-전문,『문학과사회』2019-겨울호
▶ '그'를 기리는 '나'의 자리/ 자발적 유폐와 심미의 왕국(발췌)_ 문혜원/ 문학평론가
위의 시에서 화자는 작은 소리들을 모은 큰 소리가 곧 자신이라고 느낀다. 시인은 낱낱의 이름도, 낱낱의 소리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으나 그것들이 모아진 어떤 것을 느낀다고 했다. 이것은 오만일까?/ 이 대목에서 주목할 점은, '큰 새'나 '큰 벌레'가 아니라 그렇다고 '느낀'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을 '속속들이는 알 수 없어도 알고 있는 것만 같다'는 것이다. 이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인의 입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시란 어떤 사물이나 사건, 감정 등 대상을 '속속들이' 알아야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이때 시인의 '앎'은 지식이나 이해가 아니라 어렴풋하게 그것을 감지하는 것 혹은 몸으로 그것을 감각하는 것이다. 즉, 시인으로서 장이지는 이성적인 사고가 아니라 직관과 감각에 의해 시를 쓴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인이 작은 새들과 벌레들의 소리를 느낀다는 것은 '나' 안의 타자성을 인정한다는 것일까? 자신만의 고유한 미학을 구축하는 일에 집중해온 시인이 이제 타자와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한다는 것일까?[p.225(詩)/p.227(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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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상』2020-1월호 <이 달의 문제작/ 시 부문> 에서
* 문혜원文惠園/ 1965년 제주 출생, 1989년『문학사상』으로 평론 부문 등단, 연구서『한국 현대시와 모더니즘』『한국근현대시론』등, 평론집『돌멩이와 장미,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말들』『비평, 문화의 스펙트럼』등, 대담집『문학의 영감이 흐르는 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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