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책
이수명
도서관에 앉아 있으면 시간이 빨리 흐른다. 사람들이 책장을 넘기기 때문이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이 책장을 넘긴다. 어떤 사람은 빨리 연거푸 넘기고 어떤 사람은 아주 천천히 한 장을 넘긴다. 넘겼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가 다시 넘기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왜 책장을 넘기는지 모른다.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몇 시간째 펼쳐진 페이지 그대로다. 잠자는 책에 골몰하지 않는다. 그냥 사람들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듣는다. 책장이 넘어갈 때 허공을 펼치는 소리 허공과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그것은 기침소리나 의자가 삐꺽대는 소리 펜이 떨어지는 소리만큼 정확하지 않고 매번 다른 소리다. 언젠가는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나지 않는 책이 나올지도 모른다. 페이지도 없고 책장도 없고 책도 없는 그런 책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돼도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책이 그냥 나를 스쳐갈 것이다. 앞에 앉은 소년이 필요 없다는 듯 책장 한 장을 소리나게 찢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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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2019-12월호 <신작특집>에서
* 이수명/ 1994년『작가세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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