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그늘을 비질하면 꽃이 핀다/ 최석균

검지 정숙자 2020. 1. 8. 00:34

 

    그늘을 비질하면 꽃이 핀다

 

    최석균

 

 

  뒤란 감잎을 쓸자

  흙투성이가 된 그늘이 딸려 나온다

 

  달아날 수 없는 거리를 두고

  떨림이 있던 자리 반경엔

  감미롭고 환한 증거들이 뒹굴기 마련

 

  밟힐수록 단단히 박히는 씨앗부터

  물러터진 흔적의 꼭지까지

  한 그루 감나무의 기록이 수북하다

 

  감잎 그늘을 비질하는 걸음 위로 무지개가 뜬다

  촉촉한 무지개 계단을 디디고 가면

  풋감 담가둔 항아리가 열리고 감꽃이 필 거라는 예감

 

  볕을 품다가 천둥을 새긴 파란 그늘에서

  마른 울음을 흘리다가 홀연 정신을 놓은 주홍 그늘까지

  빗자루가 쓸지 못한 그늘을 바람이 쓸고 가

  가지가지에 달아 준다

 

  뒤란엔 숨죽인 그늘의 역사가 살고

  그늘을 비질하면 수북수북 감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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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시학』2019-겨울호 <신작시> 에서

  * 최석균/ 2004년『시사사』로 등단, 시집『배롱나무 근처』『유리창 한 장의 햇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