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을 비질하면 꽃이 핀다
최석균
뒤란 감잎을 쓸자
흙투성이가 된 그늘이 딸려 나온다
달아날 수 없는 거리를 두고
떨림이 있던 자리 반경엔
감미롭고 환한 증거들이 뒹굴기 마련
밟힐수록 단단히 박히는 씨앗부터
물러터진 흔적의 꼭지까지
한 그루 감나무의 기록이 수북하다
감잎 그늘을 비질하는 걸음 위로 무지개가 뜬다
촉촉한 무지개 계단을 디디고 가면
풋감 담가둔 항아리가 열리고 감꽃이 필 거라는 예감
볕을 품다가 천둥을 새긴 파란 그늘에서
마른 울음을 흘리다가 홀연 정신을 놓은 주홍 그늘까지
빗자루가 쓸지 못한 그늘을 바람이 쓸고 가
가지가지에 달아 준다
뒤란엔 숨죽인 그늘의 역사가 살고
그늘을 비질하면 수북수북 감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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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학』2019-겨울호 <신작시> 에서
* 최석균/ 2004년『시사사』로 등단, 시집『배롱나무 근처』『유리창 한 장의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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