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빈들의 저녁/ 이재훈

검지 정숙자 2020. 1. 8. 00:09

 

 

    빈들의 저녁

 

    이재훈

 

 

  혼자 남을 때가 있다

  아무도 없고 아무 가진 것도 없이

  두려운 가난만 남아 저물 때가 있다

  무리를 떠나 빈 방에 돌아와

  두부 한 조각에 소주를 들이킬 때

  빈속에 피가 돌고 몸이 뜨거워질 때

  문득 빈 것들이 예쁘게 보일 때가 있다

  조금 더 편하기 위해 빚을 지고

  조금 더 남기기 위해 어지러운 곳을 기웃거렸다

  가진 것 다 털고 뿌리까지 뽑아내고

  빈들이 된 몸

  빈 몸에 해가 저물고 잠자리가 날고

  메뚜기가 뛰어 다닐 때

  아름다운 것을 조금쯤 알게 되었다

  들에 앉아 남은 두부 한 덩이 놓고

  저무는 해를 볼 때

  세상의 온갖 빈 것들이 얼마나 평온한지

  얼마나 아름답게 우는지

  서로 자랑하듯 속을 비워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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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시학』2019-겨울호 <신작시> 에서

  * 이재훈/ 1998년『현대시』로 등단, 시집『명왕성 되다』『벌레 신화』등, 저서『현대시와 허무의식』『부재의 수사학』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