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들의 저녁
이재훈
혼자 남을 때가 있다
아무도 없고 아무 가진 것도 없이
두려운 가난만 남아 저물 때가 있다
무리를 떠나 빈 방에 돌아와
두부 한 조각에 소주를 들이킬 때
빈속에 피가 돌고 몸이 뜨거워질 때
문득 빈 것들이 예쁘게 보일 때가 있다
조금 더 편하기 위해 빚을 지고
조금 더 남기기 위해 어지러운 곳을 기웃거렸다
가진 것 다 털고 뿌리까지 뽑아내고
빈들이 된 몸
빈 몸에 해가 저물고 잠자리가 날고
메뚜기가 뛰어 다닐 때
아름다운 것을 조금쯤 알게 되었다
들에 앉아 남은 두부 한 덩이 놓고
저무는 해를 볼 때
세상의 온갖 빈 것들이 얼마나 평온한지
얼마나 아름답게 우는지
서로 자랑하듯 속을 비워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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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학』2019-겨울호 <신작시> 에서
* 이재훈/ 1998년『현대시』로 등단, 시집『명왕성 되다』『벌레 신화』등, 저서『현대시와 허무의식』『부재의 수사학』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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