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허민_ 서정의 오늘(발췌)/ 죽은돌 : 손택수

검지 정숙자 2020. 1. 4. 01:40

 

 

    죽은돌

 

    손택수

 

 

그 섬에서는 돌을 죽은돌이라고 부른다 이름을 얻은 바위가 하나의 방향만을 허락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차라리 이름 대신 현무암의 깊은 어둠 속으로 돌을 돌려놓고 싶어한다 산정에서 누군가 거북을 보았다면 능선 쪽에서 누군가는 코끼리를 보았을 수도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죽은돌은 명명할 수 없는 계절들에 대한 최소한의 기억 같은 것, 깨트리면 파란빛이 새어 나오는 죽은돌엔 실로 얼마나 많은 생들이 꿈틀거리고 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산을 넘어가는 바람이 웅 웅 모골이 쭈뼛해오는 소리를 낼 때 죽은돌이 산의 목젖처럼 떨리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바람과 파도의 영혼을 가진 누군가에게 죽은돌은 식어 굳어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흐르던 그대로 생성 중인 용암반죽 덩어리다 돌은 바다를 뚫고 막 융기하던 섬을 기억하고 있다 어디를 뒹굴든 돌이 중심을 놓치지 않는 이유이다 그 섬에서 돌은 비구름에게도 끌과 정을 쥐여주고 끝도 없이 꿈틀대고 있다 그건 돌의 수긍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돌이 죽은 날로부터 섬에 생명이 깃들기 시작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죽은돌 아래로 내려가 돌들을 섬긴다 

   -전문-

 

 

   ▶ 서정의 오늘/손택수의 시가 피어나는 자리에 관하여 (발췌)_ 허민

  "그 섬에서는 돌을 죽은 돌이라 부른다." 죽어야지만 비로소 살 수 있는 돌은 명명할 수 없는 '최소한의 기억'을 품고 있다. 존재를 살해하는 명명/이름 대신에, 차라리 죽음을 택해야만 하는 돌의 운명은 어쩐지 도시의 행복 속에서 섬의 지리학을 이해하지 못했던 가난한 영혼의 사연을 닮은 것 같다. "바람과 파도의 영혼을 가진 누군가에게 죽은돌은 식어 굳어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흐르던 그대로 생성 중인 용암 반죽덩어리다." 돌의 무덤에서 피어나는 서정이란 현무암의 깊은 어둠 속으로 돌을 돌려놓고 싶어 하는 의지에서 비롯될 수 있다. 돌이 죽은 날로부터 섬에 생명이 깃들기 시작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돌의 수긍을 믿는 자들이고, 자신의 흐릿해진 영혼을 섬길 줄 아는 자들이기도 하다.(p.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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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여는세상』2019-겨울호 <집중 조명, 이 시인/ 작품론 > 에서

  * 손택수/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1998년《한국일보》신춘문예 시 부문  & 《국제신문》신춘문예 동시 부문 당선, 첫 시집『호랑이 발자국』『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등, 청소년시집『나의 첫 소년』, 동시집『한눈 파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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