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2013년 여름호 <작시집 엿보기>
정신의 표상으로서의 달
-『뿌리 깊은 달』(천년의시작, 2013)
정숙자
시집이 출간 된 지 한 달이 되었다. 책이 나오면 으레 뒤숭숭하니 바빠지게 마련, 이제 겨우 마음을 가다듬어야겠다싶은 찰나 원고를 쓰려니 왠지 서먹하다. 글이란 이렇게 잠시라도 만나지 못하면 사뭇 토라져 구슬리기가 쉽지 않다. 원고 청탁서에 적힌 대로 이 지면은 ‘자작시집 엿보기’이므로 표제시부터 건드려볼까?
소용돌이 휘말려 대가리 박살났을지라도
산산조각 다시 뭉쳐
강물의 호수의 바다의 심장이 되는
늦가을 어스름이면 쩌렁쩌렁
더욱더 불타오르는
그물로 작살로도 건질 수 없는
눈으로만이 만질 수 있는
오로지, 오직 한 마리
모남 메마름 게으름 서두름 없이
물결 한 결 헤집음 없이
산 넘어 또 산 넘어 서방정토까지 혼자이지만
접었다 폈다 마침내 둥글어지는 독야청청 저 물고기!
실개울에도 흐르고 있어
우리들 가슴에도 뿌려져 있어
내 인생 견문록 참회록에도 새겨져 있어
천천히 찬찬히 구름과 바람 사이를
온밤을 꿋꿋이 돌보고 있어
-「뿌리 깊은 달」전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달’만큼 우리의 사랑을 받아온 대상도 흔치 않다. 각기 다른 지역과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달은 늘 회자의 중심에 있어왔다. 오직 하나뿐인 달이지만 그 외양에 걸맞게 이름만은 다양하다. 초승달, 보름달, 그믐달은 물론이요 반달, 쪽달, 낮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희로애락을 무수히 품고 간직해온 달이니만큼,
「뿌리 깊은 달」을 (원고지에) 띄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조주의 이론에 어느 정도 접근했다손 치더라도 전혀 다른 사물을 연결하여 이미지화한다는 것은 행운의 도움 없이는 꿈꿀 수 없는 일. 그런데 우리는 무모하게도 그 ‘꿈꿀 수 없는 일’에 매 순간 도전한다. 부귀와 영화를 외면한 채 빈약한 제 가슴을 향해 직진, 돌진, 평생을 꼬부린다.
역부여시(亦復如是)! 우리는 물속에서 부서지는 달 이상으로 파열되고, 오열하며, 발열을 견딘다. 허공을 넘나들고 비바람에 시달리며 고도의 절벽을 벗 삼기도 한다. 필묵만으로도 그렇거늘 전후좌우 세파(世波)로 인한 통증 또한 만만치 않다. 흔들림 없는 뿌리의 강인함을 차용하지 않고서야 어찌 잉크라는 장강(長江)을 건널 수 있으랴.
언제 어디서나 운명을 감내하며 만월을 이뤄내는 달이야말로 정신의 표상이다. 그러므로 ‘뿌리 깊은’과 ‘달’의 접목은 성립된다. 하늘에서 지하까지를 관통하는, 태초와 오늘/미래까지도 아우르는, 흑암을 성의(聖衣)로 바꾸어버리는 짱짱함 그리고 문단의 말석에서 조용히 늙어가는 한 시인에게도 따뜻이 팔을 벌려주시는 달! 님! ……에게 졸시 한 편을 바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천지신명을 우러러 감사드린다.
내 경우 한 권의 시집을 엮을 때 가장 고심하는 부분은 표제이며 표제시다. 이 시집에 실린 52편 가운데「뿌리 깊은 달」을 표제시로 선택한 이유는 전통적 정서와 가락을 지녔으면서도 모더니티를 살린 골격이 시집 전체를 버티어줄 만하다고 여겼음이다. 이 시집『뿌리 깊은 달』에는 실험시, 체험시, 생활시, 골계시, 애정시, 생태시, platonic poetry, 캘리그램시, 메타시 등이 섞여 있다. 더 세분하자면 운문시와 산문시, 긴 시와 단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구조주의시와 자연주의시의 어울림에 대해서도 고심-고심했다. 읽는 이에 따라서는 ‘움퍽짐퍽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의도된 편집임을 밝힌다. 이번 시집의 콘셉트는 다양성의 조화이기 때문이다.
한 권의 시집이 세상에 던져지면 어느 누가 펼치더라도, 가령 초등학생이 읽더라도 단 한 편이라도 수렴되도록 배려하고 싶은 게 나의 본심이다. 전문가에게만 유용한 시집일 때 그 시집은 사회 앞에 선물이 되지 못한다. 시는 아무리 체격이 약해질지라도 문화의 선두이며 현장이고 비전이다. 가급적 더불어 호흡할 수 있는 틈새를 열어두기도 해야 한다고 본다. 더구나 현대는 ‘바쁨’의 시대이고 크로스오버시대이며 하이퍼텍스트시대다. 시집 한 권에서도 수필이나 소설적 묘미를 맛볼 수 있다면 적으나마 퓨전효과가 담보될 것이리라. 부언하건대 한 권의 시집뿐 아니라 한 편의 시에서조차 본인은 일찍이 그것을 꾀해왔다. 그리고 이 모든 모험의 결과는 순전히 필자가 책임져야 하며 화자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중언부언하다보니 지면이 다 찼다. 산발적으로 흩어 엮은 작시법 시리즈 10편 중 하나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맺어야겠다. 이 작시법 시리즈는 메타시의 일환인데, 우리에게는 작품의 이면을 보여줄 기회가 없어 부끄럽지만 펜에 담아본 것이다. 만일 나의 손녀나 더 먼 어느 후세가 읽게 되었을 때, 어떤 분야에서든 도저한 노력 없이 결과만 탓하면 안 된다는 뜻을 전하고 싶어 특히 집필한 것이다. 나는 늘, 언젠가는 내 자식이 읽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 책이야말로 양식-음식이니 어찌 그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면이 정글이다
내면을 장악한 게 고통이라면 나는 그 놈을 사냥할 것이다
관찰 해부 소화할 것이다
태양은 구름장 지우며 돌고 나는 바람 맞으며 탄다
모든 생명은 태양의 사리이리라
종이 위 낱낱 시어는 누군가의 심장을 말린 구슬이리라
눈물 통통 살 오르는 날 나는 물었다
우주 시간 비추어 볼 때 지구 시간이란 얼마나 가벼운가
실존 또한 얼마나 짧은 끈인가
아끼지 않을 것이다
희귀한 놈 걸리면 더욱 예리한, 은밀/정밀한 칼질 필요하겠지
OK! 시간을 바칠 것이다
일필휘지 원치 않는다
시인에게 시는 여벌이 아닌
놓치면 죽을 수밖에 없는 들숨이며 자양이며 밧줄이다
내가 바라는 시니피에는 이웃집 담벼락에 있지 않고 저잣거리에 있지 않고 살갗에 있지 않다
인간을 소우주라고 칭한 바에야 자신 안에 잠복하고 응시할 테다
다작일 것도 없다
한 편을 포획하는 데 평생을 기울인들 어떠리
그 놈이 바로 하늘을 업은 그 놈이라면
-「나의 작시전(作詩戰)」전문
'제8시집 · 뿌리 깊은 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집『뿌리 깊은 달』평론_ 신간 시집 읽기/ 금은돌 (0) | 2013.06.14 |
---|---|
인터뷰, 환희로 피어난 시의 표정들/ 김제욱 (0) | 2013.06.13 |
시집『뿌리 깊은 달』평론_ 물결 깊은 각(角)의 서정/ 김창희 (0) | 2013.06.13 |
시집『뿌리 깊은 달』평론_시집 속의 시 읽기/ 정겸 (0) | 2013.05.26 |
평론, 정숙자의 시 <소소소>에 대한 감상평/ 장종권 (0) | 2013.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