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검은 비둘기 외1편/ 나정욱

검지 정숙자 2024. 8. 8. 02:29

 

    검은 비둘기 외1편

 

    나정욱

 

 

  비둘기가 내려앉는다 

  그곳은 천사의 자리 그러니까 지금은

  비둘기의 자리다

  천사처럼 날개를 접고 앉아 있는 비둘기

  천사가 있다면 지금의 비둘기처럼 조신할 것이다

  가만히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비둘기

  비둘기는 할 일이 없다

  천사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필요했던 곳이 이곳 천사의 자리

  오늘은 비둘기가 천사처럼 앉아 있다

  천사가 있다면 비둘기처럼 울지 않을 것이다

  구구구 울지 않아도 세상은 울음에 젖어

  비둘기의 울음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필요했던 곳이 천사의 자리인데 오늘은

  그 자리에 비둘기가 앉아 있다

  멀리서 보면 날개 접은 그 모습이 천사가 분명하다

  앉았던 그 자리에서 날아오르는 순간

  천사는 비둘기처럼 사라진다

  천사나 날개 가진 것들은 날개를 접었을 때

  비로소 실체가 보인다

  날아가 버린 천사는 보이지 않는다

  천사가 날아간 어제 그 자리

  오늘은 시커멓게 날개 접은 그것이 앉아 있다

  검은 옷을 입고 날아가는 비둘기를 겨냥하고 있는

  저 검은 천사의 이름을

  뭐라고 부를까

    -전문(p. 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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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룩진 유전자

 

  아름답고 깨끗했던 나의 유전자가 지금은 얼룩진 유전자가 되었네

  어떻게 아름다운 꽃이라 부를 수 있으랴

  지독하고 지독한 것만이 살아남은 이 지구의 생명체들

  원래 생명의 본질이 그런 거라고

  원래 자연의 법칙이 그런 거라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거라고

  신이 있다면 이런 상황을 신이 모를 리가 없다고

  그러니 그런 줄 알고 삶을 긍정하라고

  그러나 얼룩지고 얼룩진 나의 유전자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얼룩지고 오염된 모습

  이걸 하나로 함축하고 피어 있는 한 송이 꽃

  꽃 같은 너

  너를 어떻게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으랴

  봄이 되면 여기저기 종기처럼 피어나는 꽃들

  전쟁터에 터지는 포탄의 파편처럼 날리는 얼룩진 꽃잎들

  포화 속에 스러지는 무수한 어린애들을 보면서 어떻게 꽃들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으랴

  무수한 주사약과 경구약으로 얼룩진 몸처럼

  전쟁으로 신음하는 지구와

  거기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 내 몸은 어쩌면 이렇게 닮은 것이냐

  내 몸의 유전자처럼 얼룩져 피어나는 봄,

  꽃을 보고 나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얼룩지고

  얼룩진 내 얼굴 같은 언어의 파편으로 기워진 나의

  시편들!

    -전문(p. 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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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얼룩진 유전자』에서/ 2024. 7. 27. <상상인> 펴냄

나정욱/ 1990년『한민족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며칠 전에 써 두었던 내 문장에서 힘을 얻는다』『눈물 너머에 시詩의 바다가 있다』『라푼젤 젤리점에서의 아내와의 대화』, <한국작가회의> <울산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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