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안락사 외 1편/ 성향숙

검지 정숙자 2023. 11. 15. 01:27

 

    안락사 외 1편

 

     성향숙

 

 

  고통을 덜어줘야 한다는 의견 분분했다

 

  지친 호흡기에 의지해 목숨을 부지하는

  늙고 주름진 아기에게

  살아생전 가장 편안한 잠이 되리

 

  잘 자라 아가야,

  잘 자라 공기야,

  잘 자라 쥐야, 고양이야, 바퀴벌레야,

  별들아, 바람아, 꿈들아, 꽃들아, 나무야,

  잘 자라 예쁜 인형아, 빨간 잠바야,

  내일을 향해 가지런히 놓인 흰 운동화야,

  잘 자라 세상의 온갖 소리들아,

  어둠의 희망들아, 빛의 놀라움들아

       -전문(p.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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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중력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집안은 텅 빈 진공이야 

  고독이야 밥상 위로 올라오고

  젓가락으로 헤집어 고독 한 알씩 입속에 넣는다

  양 팔 벌려 이리저리 휘젓고 다녀도

  바람조차 느껴지지 않는

  큰 소리는 안 들리고 작은 소리는 귓구멍을 뚫는다

  기둥에 머리 박거나 식탁에 무릎 부딪힐 일도 없는

  두 발과 머리는 밤낮 구별 없이 같은 높이에서 버둥거리고,

 

  불을 끄자 집이 우주선처럼 둥둥 떠 다녀요 비행은 충분히 고독한 여행이죠 시커먼 어둠 속을 통과한다는 것은 밤의 성감대를 건드리는 겁니다 건드릴 때마다 별이 반짝거리죠 우주를 여행한 그녀는 몇 번의 오르가즘을 느꼈을까요?

 

  어둠일 때 종종 몸에 칼금이 그어지길 원합니다 성처의 틈으로 빛이 몸속에 스며들기를 바라는 거죠 어둠이 검다는 고정관념은 버릴 겁니다 어둠이라고 느낄 때 난 머릿속이 하얘지거든요 끊임없이 교접하는 하얀 명사를 고봉으로 퍼 놓고 혼자 향을 느껴요 명사 한마디로 규정할 수 있다면 모든 이미지는 쉽게 손아귀에 잡힐까요?

 

  수면 양말을 신고 잤더니 쥐를 밟아 죽이는 꿈을 꿨어요 죽은 쥐 썩는 지독한 냄새, 꿈도 냄새를 맡는가 봐요 그 냄새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죠 아무도 내 잠을 깨울 사람 없는 허공, 허공 속엔 고요가 별처럼 반짝거리죠 내가 태어난 별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바람을 잔뜩 입에 문 검은 비닐봉지처럼 붕붕붕, 

    -전문(p. 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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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무중력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에서/ 2020. 8. 1. <시와반시> 펴냄

  * 성향숙/ 경기 화성 출생, 2000년⟪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 2008년『시와반시』로 등단, 시집『엄마, 엄마들』『염소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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